백석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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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백석론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백석론』
1. 성장과정과 문단활동
백석(白石)의 본명은 백기행(白夔行)이다. 그러나 그는 본명인 백기행 대신 필명인 백석을 자신의 이름으로 애용하였다. 특히 백석은 문학 활동을 전개하면서 본명을 쓰지 않고 필명을 줄곧 사용하였기 때문에 본명보다 친숙하다.
백석은 1912년 7월 1일 평안북도 정주군(定州郡) 갈산면(葛山面) 익성동 1013호에서, 수원(水原) 백씨 17대손인 아버지 백시박(白時璞)과 단양(丹陽) 이씨인 모친 이봉우(李鳳宇) 사이에서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백석은 7살이 되던 1918년에 오산소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리고 13살이 되던 1924년에 오산 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여 18세기 되던 1929년에 오산고보를 졸업하였다. 말하자면 대학 이전까지의 학창시절 전부를 백석은 정주의 오산학교 교정에서 보낸 셈이다.
백석의 집안 형편은 그다지 여유롭지는 못한 것 같다. 이는 오산고보를 졸업한 후 집안 형편상 대학에 진학하지 못한 것에서 알 수 있다. 그는 어린 시절 내성적인 성격이었는데, 이러한 내향성은 그의 시세계에서 관조의식으로 연계된다. 또한 결벽증적인 그의 행동으로 오해를 받기도 했으며, 불교와 문학에 관심을 가지던 시기도 바로 이 시기이다.
오산고보는 백서의 문학관 형성에 있어서 지대한 영향을 주게 된 김소월의 모교이기도 하다. 백석은 김소월 시의 내용상 특질로 ‘고향, 술, 채무(債務), 인정’과 같은 것을 지적하고 있는데, 이 중 ‘고향’과 ‘인정’은 백석 시의 한 특질을 형성하는 요인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유사점은 백석의 생애와 김소월의 생애가 비슷한데서 연유하는 것 같다. 즉, 정주가 고향이라는 사실, 오산학교를 졸업했다는 사실, 고향을 떠나 방랑하는 삶을 살았다는 사실이 그것으로, 그가 타향에서의 어렵고 궁핍한 생활에서 인정을 그리워하고 공동체적인 고향을 찾는 것은 극히 자연스럽다 할 것이다. 이로 볼 때 김소월의 고향에 대한 그리움, 인정과 사랑에 토대를 둔 유대관계의 동경 등은 백석의 문학관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1930년 1월 조선일보 신춘문예 공모에서 이 소설 부문에 당선되었다. 그 후에 조선일보후원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동경의 청산학원에서 영문학을 수학하였다. 1934년 청산학원을 졸업한 그는 에 입사하여 출판부 일과 계열사인 지를 편집을 하면서 본격적인 창작활동을 시작한다. 그는 외국어 실력을 바탕으로 외국문학과 관계된 글을 번역 .소개하였고, 등단 장르였던 소설을 두 편 발표하였으며 수필을 한 편 썼다. 이렇듯 백석의 공식적인 문단활동은, 시 분야에서 시작하지 않고 소설 분야에서 시작된다. 하지만 백석은 두 편의 단편 소설 와 를 쓰고, 세 편의 외국 소설을 번역한 것 말고는 거의 모든 힘을 시 창작에 쏟는다.
1935년에 조선일보에 시 ‘정주성’을 발표하고, 그 후 첫 시집(1936,1.21)을 선광인쇄주식회사에서 200부 한정판으로 간행한다. 이 시집을 발간하면서 백석은 1930년대 우리 시단의 신진시인으로 자리를 굳히며 많은 관심을 받는다. 그 해 4월에 조선일보를 사직하고 함경남도 함흥의 영생고보의 영어 교사로 자리를 옮겼다. 이 무렵에 함흥에 와 있던 기생 김진향을 만나서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 후 1937년에 고향에서 결혼하라는 독촉을 받고 혼례식을 하지만, 김진향(자야)에게 돌아오고, 1939년에 두 번째 결혼식을 올리지만 다시 혼자 서울로 올라와서 조선일보에 재입사하여 지의 편집을 돌보다가 다시 사임한다. 이듬해 만주의 신경으로 떠나 만주국 국무원 경제부에서 일하기도 했다. 북만주 산간 오지를 여행하기도 하며 측량보조원 측량서기 소작인 생활 만주 안동에서 세관원 생활등 다양한 생업에 종사하다 해방후 신의주를 거쳐 고향 정주로 돌아왔고 그대로 북한에 남아 있었다. 해방 후 발표된 그의 시는 친구가 가지고 있다 발표한 것이고, 그 후 확인된 작품을 보면 1961년까지는 조선작가동맹에 소속되어 창작을 하고 번역을 하였으며 아동문학평론을 발표하였다.
이렇게 보면 그의 시세계는 시집「사슴」을 내던 시기와 사슴 이후 시기, 그리고 북한에서의 활동 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백석 시에 대한 연구는 재북 시인이라는 점에서 금지되어 오다가 1988년 7월 제 4차 해금 이후부터 그의 시에 대한 논의가 활발히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2. 시적 특성과 시세계
1) 모더니즘 경향인 이미지즘의 특성
백석의 등단 직전 한국 시단은 대개 세 개의 유파에 의해 그 판도가 형성되고 있었다. 첫째는 김기림이 주도한 주지주의계 모더니즘 시이고, 둘째는 카프의 발전적 전개 형태에 해당하는 현실주의 흐름, 셋째는 서정주, 오장환 등으로 대표되는 비주지주의 시인들이다. 그러나 백석의 시집이 발간되던 1936년은 모더니즘의 영향이 문단 전체를 압도했던 때라고 할 수 있다. 정지용의 『정지용 시집』의 발간과 모더니즘의 동인지라 할 수 있는 『3.4문학』(1934)이 계속 간행되고, 김기림의 「오전의 시론」(1935),「기상도」(1936) 등이 발표되어 모더니즘의 이론과 창작 기법을 보여 준 것이 그 예이다.
정지용이 탈인간의 자연에 초점을 두었고, 김기림이 외형적인 도시 풍경을 수용했으며, 김광균은 시각적 이미지에 대한 풍경모사의 즉물적 경향에 빠졌다면, 백석의 시는 그 당시의 가장 보편적이며 구체적인 생활 현실을 이미지즘의 방법과 결속시켰던 것이다. 즉 도시 문명을 토대로 한 것이 아니라, 대체로 고향과 연관된 혹은 토속적 세계에 토대를 둔 시작품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그의 시는 서구화의 격랑 속에서도 전통적인 것들을 외면하지 않은 채 오히려 그 둘을 변증법적으로 통일하고 있어 기존의 시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새로운 차원으로 이끌었다는 점에서 주목해야 할 이유를 알 수 있다.
참고문헌

김영익, 『백석 시문학 연구』, 충남대학교 출판부, 2000.
이숭원, 「백석 시의 전개와 그 정신사적 의미」, 『한국 현대 시인론』, 개문사, 1993.
정효구, 『한국현대시인연구 백석』, 문학세계사, 19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