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것들에 있어 최초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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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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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JONATHAN F. S. POST
Donnes life: a sketch
벤 존슨(Ben Jonson)이 “어떤 것들에 있어 최초인 시인”이라 언급한 존 던(John Donne)은 그의 삶이 전기로 만들어질 정도로 충분히 특별하고, 유용하게 상징적이라 간주되는 영문학 최초의 시인이다. 예술에 있어 창작에 들어가는 특정 상황들을 조명하기위해 자료를 발굴하고 분석한 그의 삶은 현대적 의미의 작가의 삶으로 보긴 힘들다. 근세(近世)에는 결핍됐으나, 그럼에도 “삶”을 찬양한 이와 같은 문학전기는 영국 전기 작가들 중 처음으로 던의 유작인 『설교집』(Sermons)을 출간한 독실한 아이작 월튼(Izaak Walton)에 의해 쓰였다.
월튼은 그의 전기 대상인 던 보다 한 세대 젊은 인물이었으며, 때로 사실만큼 허구를 집어넣기도 했지만, 그의 업적―던의 친구인 헨리 워튼(Henry Wotton)이 수집한 기록들로 구성 된 자료들―덕분에 현대 작가들로부터 교정되고 추가된 던의 삶을 세상에 존재하게 할 수 있게 한 것이다. 특정 부분에 있어 논쟁의 여지가 있지만 그의 삶은 영국 근세의 다른 어느 작가들보다도 생생하게 상상할 수 있게끔 남아있다. 기록에 공백이 존재하긴 해도 종종 우리는 그의 이야기 중에서―예를 들어 『노래와 소네트』(Songs and Sonnets)와 같이―가장 조명하길 바라는 부분이 있다. 존 던 생애의 간략한 스케치는 네 단계로 나눠 볼 수 있을 것이다. 첫 단계는 그가 태어난 1572년부터 1591년까지이다. 존 던은 유년시절 가정에서 교육을 받고 대학을 거쳐 해외를 여행한 후, 직장을 구하기 위해 런던에 다시 정착했다. 비록 이 초기 시기의 활동과 행방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확실하진 않지만, 통례적 견해는 가톨릭 “귀족”으로서 던의 불안정한 상황을 계속해서 강조하고 있다. 존 던과 이름이 같은 그의 아버지는 웨일즈 키델리의 던(Dwn) Donne의 웨일즈어(Welsh)이다.
가문의 자손이었으며, 부유했으나 단명한(설교자이자 시인인 존 던이 4세 때 사망했다) 철물상 관리인이었다. 그들의 고유한 귀족적 환경은 시각적으로 명백하게 존재하는데, 독일의 화가 한스 멤링(Hans Memling)이 “기증”으로써 던의 가족 3연작의 작품을 남겼기 때문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3번 결혼한 존 던의 어머니 엘리자베스(Elizabeth)는 토마스 모어 경(Sir Thomas More)의 후손이었으며, 순교한 대법관인 토마스 경과 연관된 넓은 층의 가톨릭 지지자에 속했다. 토마스 모어는 헨리 8세가 영국 국교회의 진정한 정신적 지주가 되기 위해 선언한 수장령(Act of Supremacy)을 거부하여 1534년 처형당했다. 박해당한 가족의 역사를 충분히 확인해온 존 던의 입장은 『가짜순교자』(Pseudo-Martyr, 1610)에서 종종 언급되는 인용구에서 명백히 드러난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나는 기독교인이지만 가문과 혈통으로부터 나온 것에 의한 순교의 명상 속에 항상 깨어 있다. 어떤 가정도 로마 가톨릭을 섬긴다는 이유로 그들의 사람들과 재산에 더 한 인내와 고통을 더 겪지 않았다고 믿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p.8).
“나는 기독교인이지만”라고 언급했지만, 스페인의 무적함대 아르마다가 패배한 1580년대에 존 던은 성공회교 여왕 치하에서 가톨릭교도의 삶을 살았다. 그것의 일환으로, 그는 아마 가정에서 가톨릭 신부인 교사에게 교육받았을 것이며, 1560년대 초 고대 로마의 극작가 세네카(Seneca)의 열 개의 비극 중 세 편을 번역한 것을 포함한 문학적 업적을 남긴 예수회 소속 외삼촌 재스퍼 헤이우드(Jasper Heywood)에게 가르침 받았을 것이다. 그리고 훨씬 후에, 1607-08년경 쓰였다고 추정되는 출판되지 않았던 소책자, 『자살론』(Biathanatos)의 서문에서 그의 어린 시절 교육에 대해 “내가 처음으로 받은 가정교육과 처음으로 나눈 대화는 상상된 순교에 대한 굶주림, 그리고 죽음에도 불구하고 행하는 일에 익숙한 억압되고 박해받은 종교를 가진 사람들과 이뤄졌다.”(p. 29)고 언급한다. 어쩌면 그 유명한 “형이상학적 전율”은 이러한 “가정교육과 대화” 가운데서 탄생했다고 할 수 있겠다.
존 던이 가톨릭교도라는 이유로 마주한 결과 중에 하나는 이른 나이인 열두 살 때―남동생 헨리와 함께―옥스퍼드 대학에 입학한 것이다. 기록에 의하면 던의 나이가 열한 살이라고 되어있지만, 1581년 옥스퍼드 입학규정에 따라 16세가 된 모든 학생들에게 부과된 39개항 신조와 수장령을 받아들여야하는 조건을 피하기 위하여 그런 듯하다. 이러한 양심의 이유들로 월튼이 우리에게 이야기하길, 던은 수장령을 받아들여 학위를 취득 할 수 있던 옥스퍼드에 잔류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 단계에 관련된 확실한 정보들이 부족하기 때문에, 월튼과 볼드(Bald)의 주장처럼 던이 케임브리지로 갔는지, 혹은 데니스 플린(Dennis Flynn)의 주장처럼 훨씬 이전에 옥스퍼드를 떠나 다른 가톨릭계 인물들과 파리로 갈 채비를 하고, 유럽 대륙을 여행했는지에 대한 사실여부는 상당한 논란이 있다.
던의 대학시절에 대한 두 가지 관계점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첫째로 그가 명백히 총명한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학교 교육을 사회적 관계가 가능하게 하는 것들보다 덜 중요하게 여긴 것이다. 둘째로 그가 옥스퍼드에 있는 동안 평생의 교제할 친구들을 만드는 습관을 길렀는데, 훗날 이튼 칼리지의 학장이자 베니스 대사관이 되는 헨리 워튼, 그리고 제임스 6세(영국에선 제임스 1세) 치하에 절대주의에 맞선 야당의 대변인으로서 의회 활동을 한 리차드 마틴(Richard Martin)처럼 서로 현저히 다른 영역에서 상위한 사람들과 교제한 것이다. 이 관계점은 단지 시와 산문에 있는 서간의 존재가 그의 저술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기 때문만이 아님을 강조하는데, 헨리 퍼시(Henry Percy), 크리스토퍼 브룩(Christopher Brooke), 헨리 굿이어(Henry Goodyer)와의 다양한 교우관계로, 망명과 순교에 열중하는 가족과의 균형을 유지하는데 도움을 주었기 때문이다.
1591년에 시작해서 1602년에 계속된 존 던 생애의 두 번째 단계는, 애국적인 열정이 섞인 왕위계승 문제가 특히 두드러지게 되었던 엘리자베스 통치 마지막 불안한 시기와 일치한다고 말할 수 있다. 니콜라스 힐리어드(Nicholas Hilliard)의 작품으로 추정되며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세밀화 안에 있는 18살 존 던의 모습은 극도로 세속적으로 보이는 특징이 있다. 세밀화를 기반으로 탄생한 판화는 윌리엄 마샬(William Marshall)의 작품으로 1635년 던의 시집 출판을 위해 만들어졌다. 혹자는 판화에 근거한 던의 모습을 보고 너무 많은 것을 결론지으려 해선 안 된다. 또한 칭송일색적인 전기 작가가 옮긴 말들에 과도한 해석적 비중을 둬서도 안 된다. 판화는 학자보다는 군인에 가까운 모습으로, 딱 벌어진 어깨와 한 손에 쥔 검, 아직 남아있는 가톨릭의 상징으로 달랑거리는 십자가 귀걸이를 한 존 던의 반항적인 모습을 가리키는 것이다. 마치 신흥 도시에 이름을 떨치러 온 누군가가 등장을 보는 느낌을 준다.
존 던이 다시 들어선 런던은 격변하고 팽창하는 중이었다. 헨리 8세가 1509년 즉위하고 1660년 찰스 2세가 왕위에 복귀할 때까지 인구는 10배 증가하였다. 약 5만 명에서 50만 명으로 늘어난 것이다. 과거 중세에는 도시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이 교회 첨탑이었다면, 그 시기에는 고대 로마의 거리처럼 사람으로 북적였다. 처음에 던은 이것을 생생하게 포착하고 그의 초기 풍자시와 악몽같이 혼잡한 네 번째 풍자시를 썼을 것이다.
영국의 영토 확장으로 런던은 더 이상 하나의 섬 그 자체라고 할 수 없었다. 엘리자베스 여왕 치세에는 탐험을 위한 항해 기술을 활용하기 시작했으며 새로운 전리품(영토)을 얻기 위해 포르투갈, 스페인과 경쟁했다. 1580년에는 프란시스 드레이크(Francis Drake)가 세계일주를 마치며, 반세기전 마젤란(Ferdinand Magellan)이 지구가 둥글다고 한 것을 거듭 증명하였다. 몇 십 년이 지난 뒤 1583년에는 험프리 길버트(Humphrey Gilbert)가 월터 랄리(Walter Raleigh)와 함께 뉴펀드랜드(Newfoundland)를 발견했다. 이것에 던은 “오라 여인이여, 오라”로 시작하여 “오 나의 아메리카! 새로 발견한 나의 땅이여,”라고 이어지는, 여성의 몸에 대해 열망하듯 외치며, 그의 엘레지(elegy) 현대에서 사용하는 의미인 ‘비가’(悲歌) 혹은 ‘애가’(哀歌)가 아닌 당대 유행한 연애시를 일컬음.
중에 가장 성적인 구절의 작품을 남기게 된 계기가 되었다. 여행 문학이 어느 때 보다 급성장했으며, 대륙의 지도제작자들에 의해 정교한 지도들이 생산되었다. 이 위대한 16세기는 코페르니쿠스(Copernicus), 케플러(Kepler) 그리고 갈릴레오(Galileo)와 연관된 천문학적 발견과 지도-지향적 생각이 그 시대의 흔한 현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