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 주요 등장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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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유비
자는 현덕(玄德). 묘호 소열제(昭烈帝). 전한(前漢) 경제의 황자(皇子) 중산정왕(中山靖王)의 후손이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신발·돗자리를 팔아 생계를 잇는 어려운 환경에서 자랐다. 15세 때 노식(盧植)에게 사사하여, 동문 공손찬(公孫瓚)과 교의를 맺었다. 그러나 학문을 즐겨 하지 않고 호협(豪俠)들과 교유했으며, 휘하에 관우(關羽)와 장비(張飛)를 두고 있었다.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자 무리를 모아 토벌군에 참가하여 전공을 세웠다. 이때의 공적으로 안희현위라는 벼슬길에 올랐다. 하지만 그의 지위는 오랫동안 유지되지 못했고 적군에게 패해 달아났다가 그 뒤 공손찬에게 의탁하였다. 이후 원소(袁紹)와의 대전에서 승리하여 공을 세웠다. 조조(曹操)와 서주목(徐州牧) 도겸(陶謙)과의 대전에서 도겸을 도왔으므로, 도겸이 죽자 서주목이 되었다. 하지만 여포(呂布)의 공격으로 서주(徐州)를 빼앗기고 그와 대립하게 되며 조조의 도움으로 여포를 물리친다.
196년 원술(袁術)로부터 공격을 받자 조조의 구원으로 원술을 물리치고, 진동장군의성정후(鎭東將軍宜城亭侯)에 임명되어 조조에게 의탁하였다. 그러나 조조 모살계획에 참가하였다가, 이 계획이 사전에 누설되자 하비로 탈주하였다. 원소와 조조가 관도대전(官渡對戰)에서 전쟁을 시작하자 원소와 동맹하였으나 이 전투에서 조조에게 패하게 되자 형주목(荊州牧) 유표(劉表)에게로 가서 객장(客將)이 되었다. 이 무렵 삼고초려로 제갈량(諸葛亮)을 맞아들여 그의 계략으로 형주에서 기반을 구축하던 중, 조조 휘하의 하후돈과 우금이 유표를 공격해오자 이를 물리친다. 208년 유표가 죽고 그의 아들 유종(劉琮)이 조조에게 항복하자 조조는 대군을 거느리고 형주를 공격해왔다. 유비는 오나라 손권(孫權)과 동맹하여 적벽 전투에서 조조를 대파하고 형주를 확보하였다.
조조가 한중(漢中) 침입을 기도하자, 두려움을 느낀 익주목(益州牧) 유장(劉璋)의 요청에 따라 명장 관우를 형주에 잔류시키고, 제갈량, 장비, 조운 방통 등과 함께 익주(益州)로 갔다. 하지만 군수물자를 내어주지 않고 배신한 유장을 항복시키고 촉(蜀)을 수중에 넣었다. 이때 유비의 백말을 바꿔 탄 방통이 낙봉파에서 적의 화살을 맞고 유비 대신 사망하였다. 219년 형주 땅의 영유문제를 놓고 손권과 대립하였으나, 명장 관우가 패사하고 형주는 손권에게 넘어갔다.
유비는 한중을 공격하여 한중왕이 되었으며, 220년 조비(曹丕)가 한나라 헌제의 양위(讓位)를 받아 위(魏)의 황제가 되자, 221년 그도 제위에 올라 한의 정통을 계승한다는 명분으로 국호를 한(漢:蜀漢)이라 하였다. 다음해 장비가 그의 부하인 범강과 장달에게 살해되어 그의 목을 가지고 오나라로 달아나자 유비는 형주의 탈환과 관우와 장비의 복수를 위해 오나라 손권을 공격하였다. 이릉(夷陵)의 싸움에서 대패하여 백제성(白帝城)에서 후사를 제갈량에게 위탁하고 223년 4월 63세의 나이로 병사하였다. 소열황제라는 시호가 내려지고 그해 8월에 혜릉으로 이장하였다.
조조
자는 맹덕(孟德). 묘호(廟號) 태조(太祖). 시호는 무황제(武皇帝)라 추존되었다. 패국(沛國)의 초(:安徽省 毫縣) 출생. 환관의 양자였으며 황건의 난(黃巾亂) 평정에 공을 세우고, 두각을 나타내었다. 동탁이 죽자 후한의 마지막 황제 헌제(獻帝)를 옹립하고 종횡으로 무략(武略)을 휘두르게 되었다. 200년 군벌의 최대 세력이었던 관동군의 맹주 원소를 관도(官渡)의 대전에서 격파하였다. 화북(華北)을 거의 평정하고 나서 남하를 꾀했는데, 208년 손권(孫權)·유비(劉備)의 연합군과 적벽(赤壁)에서 싸워 대패, 이후도 그 세력이 강남(江南)에는 미치지 못하였다.
같은 해 승상(丞相), 213년 위공(魏公), 216년 위왕(魏王)의 자리에 올랐다. 그는 정치상의 실권은 잡았으나 스스로는 제위에 오르지 않았고, 220년 정월 뤄양[洛陽]에서 죽었다. 문학을 사랑하여 많은 문인들을 불러들였으며, 자신도 두 아들 조비(曹丕)·조식(曹植)과 함께 시부(詩賦)의 재능이 뛰어나, 이른바 건안문학(建安文學)의 흥륭(興隆)을 가져오게 하였다. 후세에 간신(奸臣)의 전형처럼 여겨져 왔는데, 근년에 이르러 중국 사학계에서는 그를 재평가하는 논쟁이 일기도 하였다.
손권
자는 중모(仲謀), 시호(諡號) 대황제(大皇帝). 손견(孫堅)의 둘째 아들로 200년에 형 손책(孫策)이 죽자 그 뒤를 이어 주유(周瑜) 등의 보좌를 받아 강남(江南)의 경영에 힘썼다. 당시 형주(荊州: 湖北省襄陽縣)에는 유표(劉表)가 세력을 떨치고, 화북(華北)에는 조조(曹操)가 있어 남하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208년 유표가 죽고 그 아들 유종(劉琮)이 조조에게 항복하자, 조조의 압력은 더욱 강화되어 국내에서도 화전양론(和戰兩論)이 대립했으나 주유 등의 주전론이 승리하였다. 이에 손권은 촉(蜀)나라 유비(劉備)와 결탁하여 남하한 조조의 대군을 적벽(赤壁)에서 격파함으로써 강남에서의 지위가 확립되었다. 그 후 형주의 귀속문제(歸屬問題)를 둘러싸고 유비와 대립하였으나, 219년 조조와 결탁하여 유비의 용장 관우(關羽)를 격파하고 형주를 공략하였다.
그 결과 위(魏)·오(吳)·촉(蜀) 3국의 영토가 거의 확정되었으며, 오나라는 장쑤[江蘇]·안후이[安徽]의 남부, 저장[浙江]·장시[江西]·후베이[湖北]·후난[湖南]·푸젠[福建], 그리고 광둥[廣東] 방면까지를 지배하게 되었다.
221년 조조가 죽고 그의 아들 조비(曹丕)가 한(漢)나라의 제위(帝位)를 찬탈하여 황제로 즉위하자 이것을 들은 유비도 촉나라에서 한제(漢帝)를 청하였다. 손권도 이에 맞서서 황제위에 올라 연호를 황룡(黃龍)이라 정하고 도읍을 건업(建業: 南京)으로 정하였다. 그 후는 대체로 촉한(蜀漢)과 결합하여 위나라에 대항하는 한편, 국내의 발전에 힘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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