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봉건 인물 조사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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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전봉건
1. 생애(1928~1988)
전봉건은 평안남도 안주(安州)군 동면 명학리 10번지에서 부친 전형준과 모친 최성준의 7형제 중 막내로 출생했다. 군수직을 역임했던 아버지를 따라 그는 평안남도 도내의 여러 군을 전전하면서 유소년기를 보냈다. 그의 집은 경제적으로 부유한 편이어서 전봉건은 어려서 각종 그림책이나 문학서적을 손쉽게 접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그림책과 소년소설 등에 지나치게 빠져 탐독하다가 안주중학교 입학시험에 불합격하기도 했다. 그는 초등학교 때, 작문을 잘하여 선생님으로부터 크게 칭찬을 받았는데, 이는 그가 받은 ‘생애 첫 칭찬’으로 시인의 길에 첫 번째 영향을 준 사건으로 회상하고 있다고 한다.
그는 1945년 3월 평양 숭인 중학교를 졸업하였는데, 중학교 3~4학년 경에 몇몇 친구들과 함께 빛바랜 파지를 실로 꿰매어 문학동인지를 만들기도 했다. 그는 중학 시절 바로 위 형인 전봉래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데, 그의 형은 당시 일본 동경 소재의 ‘아테네 프랑세’에서 불문학을 전공하고 있었다. 그의 집에는 각종 문학전집과 원서들이 많았고, 전봉건은 서재가 있는 형의 방에서 많은 문학서적을 탐독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중학교 1,2학년 때 이미 하이네의 시집과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등을 지니고 다녔다고 한다. 그는 이 시절의 독서편력과 청년기에 접했던 클래식 음악, 이 두 가지를 두고 자신의 인생과 문학에 있어서 자양분이 되었다고 항시 말했다고 한다. 그리고 중학교 4학년 때인 1945년에는 시나리오 작가 오영진이 영어 선생으로 부임하여 그로부터 유럽의 문학가들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듣고 감동을 크게 받았다. 뿐만 아니라 이들의 관계는 이를 계기로 오랫동안 지속되었다고 한다.
1946년 가족들과 함께 청천강을 건너 월남하였다. 그는 월남 직후 경기도 양주군에 있는 갈매국민학교에서 임시교사로 잠시 근무했다. 이 시기에 그는 시작에 몰두하게 되었고, 그가 문단에 정식 데뷔하기 전에 쓴 작품으로 와 이 있다. 이들은 당시의 신문이나 잡지에 발표되지는 않았으나, 후에 시집에 수록된 작품들이다. 이 무렵에 서대문에 있는 음악다실 ‘자연장’에서 송욱·송혜수·박고석 등과 교유하였다.
1950년 서정주에 의해 과 등의 시작이 《문예(文藝)》에 발표, 추천을 받게 되고 김영랑에 의해 가 《문예(文藝)》에 추천을 받아 문단에 등단했다. 6.25사변이 일어나자 곧바로 군에 징집되어 20일간의 훈련을 받고 그 해 12월 중 동부 전선에 위생병으로 배치되어 근무했다. 중동부 전선에서 파편에 맞아 오른손 검지에 부상을 입고 대구, 마산의 육군병원을 거쳐 통영에서 제대했다. 제대 직후에는 부산에 있는 형 전봉래를 찾아갔으나, 형은 이미 자살한 뒤였다. 그는 이 일로 말미암아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게 된다. 이때 그의 형은 종군 작가단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다시 대구로 간 전봉건은 그곳에서 음악다실 르네상스를 준비하고 있던 이철범, 최계락 등과 만나 그들과 함께 음반을 정리하면서 기식한다. 김종삼 등 많은 문인들과 교유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부터이다.
53년 7월 휴전이 되고 서울로 올라와 월간지 희망 출판사에서 일함으로써 출판계에 발을 들여 놓는다. 희망사를 사임한 뒤에 예술시보사에서 일한다. 이 무렵부터 그의 종군 경험을 바탕으로 한 시편들을 발표하기 시작한다.
전쟁 때 참전한 경험을 살려, 김종삼(金宗三) 등과 연대시집 《전쟁과 음악과 희망과》를 간행, 젊은 전쟁세대의 의식형성에 촉매 역할을 했다. 전쟁을 전후한 《사랑을 위한 되풀이》《검은 항아리》《속의 바다》등은 시작의 절정을 이룬 대표작이다. 이와 같은 작품을 통해 그는 초기의 ‘순수 이미지의 추구’라는 실험을 거쳤으며, 이어 “사상은 시가 아니지만, 시는 사상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을 내세워 의미의 부여와 기교의 천착이라는 양면성을 계속 추구했다. 이후 계속 출판계에 몸담고, 1964년 《문학춘추》, 1966년 《여상(女像)》의 편집장, 1969년 《현대시학(現代詩學)》의 주간을 맡았다. 시인협회상, 대한민국문학상, 대한민국예술상을 수상했으며, 그 밖의 작품에는 시집에 《전봉건 시선》《피리》《북의 고향》, 시에 《너와 구름과 나》《마지막에 누구도》《손》《태양》《새벽》 등이 있고, 평론에 《시의 비평에 대하여》《음악의 의미》《시인과 독자의 광장》《박목월의 사력질(砂礫質)》이 있다.
2. 문학적 특성
문학사에서는 전봉건을 ‘6.25 전쟁이라는 특수성을 가장 서정적으로, 가장 지속적으로 노래한 시인’, 혹은 ‘6.25체험으로 인한 피의 이미지를 다양하게 변주하고 의미화한 시인’으로, ‘초현실주의적 미학을 잘 다루고 있는 테크니시앙’ 등 전후 모더니즘의 기수로, 진한 에로티시즘의 시학을 수립한 시인으로 기록한다.
1)초기(50년대~60년대 초반): 전쟁의 이미지가 지배적으로 사용되며, 1인칭 화자가 언술의 중심을 이룬 시기이다. 김종삼, 김광림과의 합동시집 「전쟁과 음악과 희망과」와 시집「사랑을 위한 되풀이」등 50년대에 발표된 시편들은 시·공간적으로 전쟁과 인접해 있고, 따라서 이들 시편들에는 피, 총, 폐허, 포로, 6월, 철조망, 죽다, 쓰러지다, 넘다 등의 시어가 지배적으로 사용된다. 이는 이 시기가 실질적인 전쟁이 이루어진 3년의 전시를 포함하여, 그 후 전쟁의 피해를 복구하고 후유증을 치유하는 기간 즉 전후에 해당하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초기 시편들은 유심히 살펴볼 때 그 상황적 맥락인 전쟁모티프는 시적 화자의 독백적 언술 속에서 전쟁의 이미지를 전경화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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