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 게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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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체 게바라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체게바라
게바라의 생애 중 영향을 많이 미친 두 사람을 여러분꼐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첫 번째는 일다 가데아 입니다.
1. 일다 가데아
체 게바라는 멕시코에 머물던 중 여성운동가 일다 가데아를 만나게됩니다. 그녀는 페루의 순수 마르크스 주의 영향을 받은 이로서 이런 정신을 바탕으로 혁명에 대한 이야기를 그와 많이 나누면서 그의 정치적 행보를 사회주의로 만드는데 많은 기여를 했다. 그 둘은 1955년 8월 18일 결혼식을 올렸고 그녀는 그가 쿠바의 혁명을 이루는데 뒤에서 끝까지 기다렸고 지지하였다. 하지만 체가 투쟁중 만난 알레이다 마치에게 마음을 주면서 일다 가데아와 체 게바라는 헤어지게 됩니다.
두번쨰로는 피델 카스트로 입니다.
그는 1926년 카스트로 아시스라는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아바나 대학교를 입학해 법학을 공부하고 변호사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부패한 쿠바 정권을 살리기 위해 학생운동에 참가 후에는 쿠바 혁명의 리더로서 성장하게 됩니다. 그는 체 게바라를 만나 동지를 맺고 그에게 많은 애정을 쏟으면서 혁명의 동지이자 스승으로 그의 옆에 남게됩니다. 어떻게 보면 게바라와 카스트로는 라이벌 구도로 비춰질 수 있는데 게바라가 그를 많이 의지하고 스승으로 모셨기 때문에 라이벌 보다는 동지에 더 가까운 관계입니다.
후에 쿠바 혁명이 성공한 후 쿠바의 총리가 되고 현재까지 살아있는 쿠바혁명의 리더 입니다.
그 다음으로 체 게바라와 혁명에 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그의 첫 혁명 운동인 쿠바 혁명은(1953년 7월 26일 ~ 1959년 1월 1일)은 피델 카스트로, 체 게바라, 라울 카스트로 등의 사회주의 혁명가들이 두 차례에 걸친 무장 투쟁을 벌여 1959년 1월 1일 완수한 혁명을 말한다. 7월 26일단과 혁명 조직들이 당시 풀헨시오 바티스타 장군의 독재 정권을 전복하여 쿠바는 공산주의 국가가 되었습니다.
1956년 12월 2일 피델 카스트로가 이끄는 82명의 무리가 무장 저항 운동 단체를 설립할 목적으로 시에라 마에스트라(Sierra Maestra)에 도착하였다. 1958년말, 그들은 시에라 마에스트라를 박차고 나와, 봉기를 일으켰고, 많은 사람들이 동참하였습니다. 이들이 산타 클라라(Santa Clara)를 점령하자, 바티스타는 포르투갈로 탈출하였다. 바르킨은 카밀로 시엔푸에고스(Camilo Cienfuegos), 체 게바라, 라울 카스트로 및 그의 형제 피델 카스트로와 지휘권의 상징적인 변화에 대하여 협상하였다. 이것은 대법원이 그 혁명의 법원성(法源性)을 인정하고, 그 대표자가 명령권을 가진다고 결정한 이후에 나온 것이었다. 카스트로의 군대는 1959년 1월 8일 수도에 입성하였습니다. 마누엘 우루티아 레오(Manuel Urrutia Lleo) 가 권력을 쥔 뒤 얼마 후, 피델 카스트로가 그를 공격하였고, 결국 그는 미국으로 탈출하였습니다. 그의 탈출로 쿠바는 카스트로와 체의 혁명단체가 장악하게 되는 혁명의 성공모델이 됩니다. 그는 59~65년 사령관, 은행 중재, 사업부 장관 등을 역임했지만 정치에 관해 전문적이 없던 그는 정치적 문제보다는 쿠바의 의료 복지 개선에 더 힘썼습니다. 그러던 중 65년 4월 돌연 사라집니다.
두번째로 그 외 혁명은 콩고 혁명입니다. 그가 쿠바를 떠난 뒤 향한 곳은 독립국 탄생이 한창이던 아프리카였고 그 곳에서 내전이 한창인 콩고에서 자기 자리를 찾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스페인어와 가톨릭으로 공통점이 많은 남미와는 달리 생소한 환경의 아프리카는 그가 생각한 세상이 아니었습니다. 자칭 공산주의자들은 약탈밖에는 관심이 없는데다 총소리만 들어도 앞다투어 달아나는 오합지졸들뿐이었습니다. 게다가 중국과 소련 간의 갈등은 이곳에서도 그의 발목을 잡아 친소 국가인 쿠바 출신의 그를 중국의 지원을 받는 콩고 공산세력은 다짜고짜 적대시했습니다. 문화적으로 괴리감을 느끼고 전투에 의지가 없는 것처럼 보이는 이들에대해 연이은 좌절에 피폐해진 그는 일단 남미혁명이라도 완수하겠다고 생각, 1966년 11월 변장한 채로 볼리비아로 입국하게 됩니다.
그곳에서 두번째 혁명을 시도합니다. 그 혁명은 볼리비아 혁명입니다.
게바라는 볼리비아 공산당과 연계해 혁명을 일으키려 했으나 소련에게서 낙인찍힌 그를 볼리비아 공산당은 대놓고 군 식구 취급했고 여기 지휘권 문제까지 불거지자 거의 빈손이나 다름없이 정글로 향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보수적인 볼리비아 농민들 또한 이 외지인들을 반기기는커녕 적대시하여 신고를 하는 지경이었고, 현지 원주민들은 백인인 그의 말을 들으려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볼리비아에서 공산당 지지 세력은 농민들이 아니라 광부나 도시 노동자였으나 그 누구도 이 사실을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오랜 동지인 카스트로조차 침묵했습니다.
거기에다 미국의 추적이 더해졌습니다. 너무 유명해진 그는 미국에게도 카스트로 다음 가는 눈엣가시로 여겨졌고, 그의 입국이 확인되자 CIA가 나서서 네이비 씰에 의해 양성된 정예 레인저 부대를 인간 사냥에 투입했습니다.
영양실조와 이질에 시달리며 11개월 동안 추격을 피해 도망쳤으나 결국 1967년 10월 8일, 추로 협곡 전투에서 본대와 떨어진 상태로 몇 안되는 부하들과 함께 정부군 특무대대의 매복에 걸려 그 자신도 총상을 입고 생포된다. 생포시 게바라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쏘지 마라! 나는 체 게바라다. 죽이는 것보다 살려두는 것이 더 가치있다."
그가 체보될 당시 초최한 모습이였고 그를 잡은 이들은 한 학교에 감금한 상태에서 다음 날인 9일, 볼리비아 정부는 미국과 CIA의 지령을 받고 그를 살려두면 훗날 큰 화가 생길거라고 판단, 그를 비밀리에 죽이기로 낙찰 합니다. 하지만 당시 볼리비아에는 사형제도가 없어 대외적으로는 게바라가 전투 중 부상으로 숨졌다고 발표하게 됩니다. 그를 사형시킬 때 몇몇 병사들이 거부해 병사들을 억지로 술을 먹여 취하게 한 뒤 총으로 쏘았다는 설이 있다. 그는 처형 직전 빈사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주저하는 집행자에게
"당신이 날 죽이려고 온 것을 알고 있소. 떨지 말고 방아쇠를 당겨라! 당신은 단지 한 사람을 죽이는 것 뿐이다!"[ 라고 일갈했다고 전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