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직 성결교 의사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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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이명직 성결교 의사부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이 명 직 - 성결교의 사부
들어가는 말
성결교에서는 이명직을 교단의 사부로 칭송하고 있다. 그리고 이명직의 생애를 보더라도 그가 역임했던 지위들과 여러 공들을 볼 때 어느 정도 그 말은 맞을수도 있다. 이번 발제는 이명직의 생애를 중심으로 하였다. 그가 걸었던 길을 자세히 따라가보고 특히 해방이전까지의 행적과 활천에서의 주필활동으로서의 역할을 중심으로 하고 나오면서 이명직의 평가에 대한 질문을 던져봄으로서 본 발제를 마무리 하고자 한다.
Ⅰ. 이명직의 생애
이명직은 1890년 12월 2일 서울의 유교적 전통집안에서 태어났다. 당연히 그는 서당에서 한학을 어린 나이에 익히게 되고 젊은 시절에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게 되었다. 그는 정치와 법률에 뜻이 있었으나 구세군의 전도활동에 매료되어 일본 동경의 기독교 청년회관(Y.M.C.A.)의 주일 예배에 참석하여 신앙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여기서 그는 조만식 같은 한국사회를 이끌어갈 훌륭한 인물들과의 만남이 그를 지도자로 세우는데 크게 도움을 주었다고 본다. 그는 결국 신학으로 방향을 바꾸어 공부를 시작하게 된다. 그때 바로 동양선교회 동경성서학원에 입학하여 신학을 공부하게 되었던 것이 성결교회와 서울신학대학교와 연결되는 계기가 된다. 이명직 목사는 1914년 4월에 성결교회에서 최초로 목사안수를 받고 규암교회의 목사로 첫 목회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1916년 경성 성서학원의 교수로 취임하여 기숙사 사감을 함께 맡아 학교를 섬기게 된다. 그래서 신학교육과 목회를 함께 담당하게 된다. 신광철, “한국성결교회의 사부 이명직 목사”회 [목회와 신학] 8월호, 1996, p.194
이명직의 생애에 관한 1차 문헌 가운데 에 실린 그의 간증문인 “은혜기”가 있다. 이 문헌을 통해 그가 어떤 배경에서 자라났고, 어떤 경유를 통해서 신자가 되었으며, 어떻게 성결교회의 성격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중요 인물이 되었는지 알아보고자 한다. 이명직, “은혜기(상)” , 제2권 10호(9월):30-33; “은혜기(하)”, 11호(10월):36-43
1. 어린 시절의 꿈, 그리고 기독교와의 만남
이명직은 1890년 12월 2일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어릴 때부터 “종교성”이 남달리 매우 풍부한 듯하다. 이명직, “은혜기(상)”, 31. 그는 자신의 종교성에 대한 생각을 이렇게 말한다: “내가 처음에 불교에 귀의코자 하던 생각이나, 예수를 신앙코자 하는 계획이 있던 것을 보면 종교심(곧 무엇을 의뢰코자 하는 마음)이 다른 사람보다 강하였던 것을 이제야 깊이 깨닫게 되었다. 그 뿐만 아니라 미루어 인성의 종교심이란 고유성인 줄도 알게 되었다”
주변의 변화를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소년 시절에 그는 불교 승려들의 모습을 자주 보면서 자랐다. 어린 마음에 스스로, “남아가 출세에 비상한 공업을 이루어 이름이 후세에 썩지 않게 되는 인물이 되는지, 불연(不然)하면 몸을 산림 속에 감추어 때로 미륵을 따르고, 초부(樵夫)로 짝하여 자유자락(自由自樂)하는 것” 이명직, “은혜기(상)”, 30
을 꿈꾸고 있었다. 그가 후에 일본에 훌쩍 떠날 수 있었던 것도 어린 시절 마음에 품은 이러한 꿈의 한 실현이었다.
“비상한 공업”을 이루고 출세자가 되는 것이 우선적인 소원이었지만, 그 내면의 세계는 삶의 “신비”에 대한 호기심과 “청정한 탈속한 생애”에 대한 한없는 소원으로 가득차 있었다. 이것은 그의 집 뒤에 속세와 떨어져 있는 사원의 풍경과, 승려들의 “한정한” 삶의 모습을 통해서 생긴 것이기는 하나, 후일 그가 기독교에 입문한 후에도 어린시절에 그리던 이러한 삶의 낭만과 멋은 자리만 달리 했지 계속 그의 종교적 영성의 틀을 제공했으리라 여겨진다. “새벽과 저녁에 그윽이 들리는 종소리는 항상 나의 기억을 새롭게 하고, 삭발 소의(素衣)로 공림(空林)간에 수집념주(手執念珠)하고 배회하는 승려의 한정한 태도를 볼 때에는 그의 생애에 무슨 신비가 있나 하고 생각하며, 저연 중 그 쇠락하고 청정한 탈숙한 생애를 흠모하게 되었다.” 이명직, “은혜기(상)”, 30
15세의 소년 명직은 다만 흠모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만족치 못하고“원위도승(願爲道僧)하여 수도(修道) 일변(一邊)에 금수(錦繡)의 팔역(八域)을 다 구경하겠다”고 생의 각오를 다짐하였다.
이명직의 생애에 새로운 전환기가 찾아왔다. “원위도승”하겠다는 그가 “복음”을 듣게 된 것이다. 어떤 경로를 통해서인지는 모르나 그는 청년회학관(Y.M.C.A.)에 문을 두드렸고, 그곳에서 공부하는 중“매일 복음의 강화를 듣는 중 예수를 믿는 것을 찬성하게 되었다.” 이명직, “은혜기(상)”,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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