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 의사회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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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80년대 의사회 운동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80년대의 사회운동
1980년 광주의 5월은 짧은 봄을 맞이하여 화려히 꽃 피우고는 장렬하게 사라져갔다. 광주가 가져온 무수한 상처는 광주에서 피 흘린 수많은 영혼들은 물론이거니와 광주를 지켜보며 눈물 흘리던 사람들 모두에게 쓰라린 아픔을 가져다주었다. 계급과 이해를 떠나,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억압받았던 수많은 민중들은 짧게 피어오른 꽃망울이 힘없이 아스라져 감을 보고 다음에 다시 찾아올 봄날을 기다리며 짧고 무거운 한숨으로 달래야 했다.
그러나 광주의 희생이 결코 헛된 것은 아니었다. 광주의 여파로 수많은 반군부 민주화 세력들과 노동자, 농민들은 혁명의 깃발을 잠시 내려놓아야 했지만, 그들의 불꽃은 결코 꺼진 것이 아니었다. 군부 탄압의 거센 바람을 견디기 위한 권토중래의 나날들을 보내고 민주화의 깃발이 다시 솟아오를 날을 기다리며 묵묵히 힘을 기르던 그들은 마침내 1987년, 광주의 참사가 일어난 지 7년여 만에 정의의 이름 아래 승리를 쟁취해낸다.
그러나 6월의 승리가 결코 우연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군부의 호도로 세간에 드러나진 않았지만 수많은 전사들의 투쟁이 있었으며, 무수한 열사들이 스러져갔다. 암중에 그들이 흘린 땀과 피는 자유의 꽃을 피우기 위한 밑거름이 되었고, 끝끝내 아름다운 꽃을 피워내기에 이른다. 사상 최악의 참사가 이 땅에 펼쳐지고, 다시 그 위로 자유의 깃발이 펄럭일 동안, 민주화를 위한 투쟁들은 어떻게 펼쳐졌는가.
광주가 몰고 온 여파
광주의 실패는 모든 사회운동을 침체기로 몰아넣었다. 학생운동 또한 마찬가지여서, 삼엄한 감시 아래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등지에서 산발적인 시위와 집회가 열렸을 뿐, 대중적 관심을 끌어 운동적 성격으로까지 발전시키지는 못하였다. 게다가 80년 12월의 ‘무림 79년에 검거된 과학적 사회주의 연맹(과사련)의 지도를 받던 학생운동가 군을 경찰이 수사과정에서 붙인 이름. 안개같이 베일에 쌓여있다는 뜻으로, 80년 12월의 검거 과정에서야 경찰은 이토록 대규모적인 운동의 흐름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무림은 정확하게 조직이라고 말하기는 힘들며, 서울대의 서클간 협의 체계를 지칭하는 것이다. 무림은 서울역 회군 당시의 주화파 경향으로 80년 당시 학생회장단들이 대부분 이러한 경향을 가지고 있었다. 광주항쟁 이후 무림은 투쟁이 만능이 아니라는 근거로 시위투쟁의 자제를 말했다. (전국학생회협의회 자료실, 학생운동사 자료집)
사건’과 81년 7월의 ‘학림 전국민주학생연맹(전민학련)의 다른 이름. 무림의 입장을 비판하면서 전개된 것으로 자연발생적, 고립분산적인 투쟁으로는 안 되고 학생운동 내부의 통일적인 지도역량을 건설해야 한다는 입장에서 전국적인 학생조직을 구성하려 했으나 검거로 좌절된다.
사건’으로 인해 학생운동은 큰 타격을 입게 된다. 그러나 81년부터 점차 증가한 학생운동은 82년에 들어서는 만여 명 단위의 대규모 시위로까지 발전하고, 3월 부산의 미 문화원에 불을 지르는 이른바 ‘부미방 사건’과 4월 강원대의 성조기 방화 사건이 잇달아 일어나면서 처음으로 당시 최우방이었던 미국을 항쟁의 대상으로 삼게 되는 발전을 보인다.
노동계도 위축되긴 마찬가지여서, 계엄 당국은 자율 정화라는 미명하에 수많은 노조 지부를 강제로 해산시켰으며, 노조의 간부들을 다수 정화조치했다. 이 과정에서 70년대 노동운동을 이끌어온 청계피복 노조와 콘트롤데이타 노조, 원풍모방 노조 등이 노조원들의 극렬한 반대와 투쟁 속에서도 해체되었다. 이에 노동자들은 ‘전국민주노동자연합(전민노련)’을 결성하여 타계급과의 연대 투쟁을 모색하지만 학림사건에 휘말려 무산된다. 결국 노동운동에 투신한 학생운동가들을 중심으로 소그룹운동론이 대두되어 이후 노동계는 소모임적 성격을 띤 소그룹들을 중심으로 활동하게 된다.
재야의 활동은 더욱 위축되어서 그나마 합법적이었던 종교계의 활동만 눈에 띄었다. 82년 부미방 사건에 대한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한국교회사회선교협의회”의 성명서 발표 정도가 국내 유일의 재야 활동이었다. 82년 12월 재야 정객 김대중은 도미하여 해외에서 활동을 시작하는 등, 국내의 재야 세력은 완전히 가라앉아 있었다.
유화국면에서의 활성화
무력으로 정권을 장악한 군부는 다가온 85년의 12대 총선에서 정통성을 인정받기 위한 제스처로 83년 말부터 이른바 유화정책을 실시한다. 제적학생복교로 시작된 정책은 학원경찰철수, 학원자율화, 해직 교수·언론인 복직, 정치인 해금까지 이어져 민주운동가들에게 불안하지만 잡을 수밖에 없는 한줄기 서광이 되었다.
처음 학원 자율화와 복교 조치는 각 대학 내부적으로 ‘학원 자율화 추진 위원회’를 구성하는 등 학원 내부의 민주화에 학생 역량을 집중시키는 부작용을 낳았으나, 곧 사회의 민주화가 우선이라는 기조가 등장하여 84년 9월, 10월의 ‘청계피복노조 합법성 쟁취대회’에 2000여명의 학생들이 참가한 것을 계기로 이후 전개된 노동법 개정운동에도 참여하는 등, 노-학 연대의 틀을 보인다. 불붙기 시작한 학생들의 열기는 점점 고조되어 11월에는 42개대 2000여명의 학생 참여로 ‘민주화투쟁학생연합(민투학련)’이 결성된다. 이 민투학련의 주축 세력이 ‘민주화 추진 위원회(민추위)’, 이른바 ‘깃발 그들이 발간한 팜플렛의 이름이 ‘깃발’이었다.
’이었는데, 11월 14일에는 이들 깃발팀을 주축으로 300여명의 학생들이 민정당 중앙당사를 점거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친다. 이러한 학생들의 활발한 반 군부 운동은 85년 2·12 총선을 맞아 그 위력을 드러내 신민당이 들러리 야당이었던 민한당을 제치고 제 1야당으로 급부상하는 놀라운 결과를 자아낸다. 학생운동은 4월에 이르러 짜임새 있는 조직력을 갖춘 ‘전국 학생 총연합(전학련)’과 그 산하의 ‘민족 통일, 민주 쟁취, 민중 해방을 위한 투쟁 위원회(삼민투)’가 발족하여 주도해 나가게 되고, 이러한 ‘전학련-삼민투’체제에서 주도한 사건중 하나가 바로 5월 23일 일어난 ‘미문화원 점거사건’이다. 이는 서울 미문화원을 삼민투 산하의 학생 73인이 점거하여 농성을 벌이며 미국 대사와의 면담을 요청한 사건으로 비록 3일 만에 끝나긴 했으나 이 사건이 몰고 온 파장은 결코 작지 않은 것이었고, 이후 개헌 운동으로까지 발전하게 된다.
참고문헌
참고문헌
한용 外, 『80년대 한국사회와 학생운동』, 청년사, 1989
한국민주노동자연합, 『한국노동운동사』, 동녘, 1994
박현채, 『청년을 위한 한국 현대사』, 소나무, 1992
조진경 外, 『한국사회의 성격과 운동』, 도서출판 공동체, 19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