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의 성 히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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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제 3의 성 히즈라
남성도 여성도 아닌, 그래서 남성이기도 여성이기도 한 히즈라에 대한 기록은 그 역사가 오래다. 흔히 ‘성애(性愛)의 교과서’로서 인구에 회자되는 까마 수뜨라(Kama Sutra)에는 (남성도 여성도 아닌) ‘세 번째 성별’에 의한 구강성교를 언급한 부분이 있다. 까마 수뜨라가 대략 5-6세기경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니 1500년 이상 전에도 성별이 불분명한 사람들의 존재가 알려져 있었던 모양이다.
이보다 훨씬 앞선 베다 문헌(종류가 다양하지만 대략 기원전 2000년 경 생성되기 시작했다고 본다)에는 브라만 근처에서 소변을 보는 천민이나 브라만 여성을 범한 하위 카스트 남성들에게 거세의 형벌을 부과하며, 거세당한 이들은 불가촉천민에 상응하는 사회에서 가장 낮은 지위를 점하게 된다는 내용이 있다. 누구도 이들 거세된 자들로부터 음식을 받을 수 없고, 종교인들도 이들로부터는 공양을 받을 수 없으며, 모든 종류의 희생제의에서 제외되고, 심지어 이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브라만을 더럽힌다고 믿어졌다.
한편 힌두 종교 중에서도 사회의 밑바닥에 있는 소외된 계층들을 평등한 신의 자식으로 포용하려는 박띠 계열의 신앙에서는 히즈라를 어머니 여신의 한 형태인 바후짜라 마따를 섬기는 집단으로 하나의 카스트처럼 여긴다. 그리고 히즈라들의 성기 절단을 바후짜라 마따에 대한 헌신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또한 히즈라들은 힌두의 대표적 신이며 양성구유의 성격을 가진 쉬바와 자신들을 동일시하여 쉬바를 섬기기도 한다. 남인도의 타밀 나두 지방에서는 히즈라를 아라바니라고 부르는데, 이들은 해마다 3-4월경 아라바니를 위한 아라반 신을 모신 사원에 모여 장장 18일간에 걸친 종교적 축제를 벌인다.
이 축제의 다양한 행사 중에서도 인도 고대의 서사시인 마하바라따(Mahabharata)에 나오는 여성으로 화현한 끄리쉬나 신과 아라반 신의 결혼, 그리고 뒤이은 아라반의 자기희생적 죽음을 재현한 연극 공연을 빼놓을 수 없다. 여성의 형상을 한 끄리쉬나는 결국 히즈라 자신의 모습이며, 생명을 희생한 남신 아라반은 히즈라들의 남편인 셈이다. 그래서인지 다큐멘터리 화면에 비친 축제의 장면에서 아라반의 죽음에 비통해하는 아라바니의 모습은 너무나도 절실해 보였다. 아마도 이러한 힌두교 박띠 전통 속에서의 히즈라의 모습은 중세 시대에 생성되었을 것이다.
13세기 경부터 북인도 일대를 지배하기 시작한 이슬람 왕조의 시대에 이들 ‘제 3의 성’은 힌두 전통에서와는 사뭇 다른 대접을 받았다. 궁중에서 왕실의 두터운 신뢰를 받았던 이들은 힌두 전통에서 말하는 히즈라라기 보다는 ‘거세된 남자들’이라는 편이 맞을 것 같다. 거세된 남성은 중국이나 우리나라의 궁중에서 봉사하던 내시라던가, 중세-근대 유럽의 성악가인 카스트라토 등 다른 문화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요즈음의 히즈라와는 달리 이슬람 궁정의 거세된 남성들은 남성의 복장을 하고 사회적으로도 남성으로서 활동했다. 어린 시절부터 궁중에서 자라며 고등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왕의 총애가 있을 경우 높은 관직에 오르거나 군대의 사령관이 되는 일도 많았고, 늘 왕실 가족을 가까이에서 보필했기 때문에 궁중에서의 지위도 매우 높은 편이었다. 아직도 델리에 있는 무굴 시대의 왕궁 근처에는 히즈라들이 모여 사는 지역이 있는데, 여기는 무굴 시대에 궁중에 살다가 영국이 무굴 황제를 폐위시킨 이후 궁을 떠나야 했던 그 시대 왕궁의 거세된 남성들이 옮겨온 곳이라 한다. 이제는 예전의 영화는 찾아볼 수 없지만, 아직도 여장을 한 히즈라들이 스승과 제자라는 새로운 가족을 이루고 ‘대를 이어’ 살고 있다.
또한 무굴 황제가 폐위되고 식민지 시대가 시작됨과 동시에 무슬림 귀족 사회에만 존재했던 거세된 남자들이 왕궁 밖으로 나오면서 힌두와 이슬람 히즈라는 처음으로 서로 만나게 되었고 식민지 시대를 거치면서 상이한 전통의 두 집단은 하나의 히즈라 공동체로 융합되어갔다. 특히 이러한 종교적 융합은 이슬람의 세력권에 있던 북인도 지역에서 뚜렷하게 나타나는 것 같다.
또한 이 시대에 영국 식민 통치자들은 대륙적 크기의 인도 땅에 사는 다종다양한 사람들을 카스트 또는 부족이라는 단위로 쪼개서 이해하고자 했는데, 이 때 히즈라 공동체는 아주 미천한 계급이며 ‘범죄 부족’이라고 구분되었다. 빅토리아 시대의 극도로 보수적인 성 관념을 갖고 살던 영국인들이었으니 사실 이상할 것도 없는 일이다. 식민지 시대에는 남성에 대한 거세가 법으로 금지되었으며, 뿐만 아니라 동성끼리의 성행위나 성기가 아닌 다른 신체부위를 이용한 성행위가 모두 불법으로 규정되어 위반시에는 형법의 제제를 받게 되어 있었다. 아마도 남성이 아니면 여성이라는 이분법적 사고체계가 세계를 지배하는 시대였으니 ‘남성도 아닌, 여성도 아닌’ 존재를 인정하기란 어려웠던 것 같다.
다양한 종교 전통 속에서 시대에 따라 다양한 지위와 다양한 모습을 갖고 살던 히즈라들은 식민지 시대에 하나의 공동체로 어우러져 가면서도 그 안에 서로 다른 다양한 단면들을 간직하고 있다. 생물학적으로 여성도 남성도 아닌 또 다른 존재라는 1차원적인-그래서 가장 근본적이기도 한- 성적 다양성의 표상임과 동시에 종교적으로는 ‘힌두도 아닌, 무슬림도 아닌’ 또는 ‘힌두이기도 하고 무슬림이기도 한’ 독특한 정체성을 갖는다. 이렇게 중간에 위치한 히즈라의 종교 정체성은 이들이 서로 다른 종교적 배경을 가졌다가 과거 어느 시기에 하나의 공동체로 융화되었던 과정이 있었음을 나타내는 동시에 종교라는 부분에 있어서까지도 흑백논리식의 이분법에 매몰되지 않는 이들의 모호한 경계를 보여준다.
힌두와 이슬람 사이에 존재하는 종교의 모호성은 특히 인도라는 상황 속에서 매우 큰 의미를 갖는다. 종교 분쟁이 피를 부르는 폭동의 소용돌이로 수많은 사람들을 몰아가는 일이 심심치 않게 일어나는 인도에서 내 종교만을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 종교의 특성까지도 내 안에 담고 이해한다는 사실은 상상하기 어려운 미덕이다. 그래서 인도 영화와 소설 속에 간혹 등장하는 히즈라들은 중간자 또는 경계인의 포용력으로 성별이나 종교에 의한 갈등과 투쟁의 상황에 현자의 한마디를 던지는 경우가 있는가 보다.
‘문명의 충돌’을 주장한 헌팅턴은 ‘반은 기독교도 반은 이슬람교도’는 불가능하다고 말했지만, 인도의 히즈라들은 ‘반은 힌두교도 반은 이슬람교도’라고 말할 수 있기에 자유롭고 수용적인 인도 문화를 이끌어갈 저력을 가진 이들이 아닐까. 그것도 가장 소외되고 불안정하게 보이는 문화의 언저리, 그 경계에 서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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