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랑스러운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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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자랑스러운 한국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먼저 우리 나라의 단군 이전에 환웅천황 (桓雄天皇)의 역사 시대가 18대 1565년 동안 있었고 또 그 이전에 환인천제(桓因天帝) 시대가 7대 3301년이 있어서, 금년까지 9183년이라는 사실이 삼성기(三聖紀) 에 자세히 적혀 있다. 그렇다면 삼성기 의 문헌사적 고증이 문제가 되겠습니다. 이 책을 쓴 안함로 (安含老)는 서기 600년경 신라 시대 사람인데 삼국유사가 나온 것이 1200~1400년경이니까, 그보다 훨씬 더 먼저 기록된 것이고 이러한 삼성기의 기록을 그대로 우리가 믿는다면, 우리나라 역사의 연조는 9천년이 넘는다고 하겠다. 그럼 9천년이란 역사를 어떻게 입증하느냐, 그러한 문헌 하나만 가지고 이것을 어떻게 외국학자들이 수긍할 수 있도록 하느냐는 문제가 생긴다. 그런데 이것이 합리화될 수 있는 외국 학자들의 논문이 이미 나와 있다.
몇 해 전에 일본에 와서 발표한 러시아의 여류 민족학자 R.S.M 자리가시노바 씨는 "한동 구석기 시대에 인류가 살았고 신석기 시대 초에 이미 독자적인 고도의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고 했습니다. 신석기 시대 초는 지금으로부터 약 1만 ~ 1만 2천 년 전이다. 그러므로 이 때 이미 우리 동이족들은 주변 국가들이 따라오지 못하는 수준 높은 독자적인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 나라 학자가 아닌 러시아 학자가 들어주고 있었다.
역시 공산국가인 중공의 유명한 고고학자 당란이, 1977.7. 14 자 중공 광명일보 를 통해 발표한 내용을 보면 "산동 반도 지역에서 남한 넓이 만한 광대한 지역에 이르는 대문구 문명권 (大汶口文明圈) 을 발견했는데, 이곳을 발굴하니까 문자가 나오고 그 곳을 통치한 소호씨(少昊氏) 란 통치자 이름까지 나왔으며, 이것을 방사선 탄소 측정을 해 보니까 지금으로부터 5785년전 것" 이라고 한다. 5785년 전이라고 하면 단군 건국보다 약 1500 년 전의 일입니다. 그 당시 이미 산동 반도에는 문자를 사용한 고도의 문명 국가가 있었는데, 그 통치자인 소호금천씨(少昊金天氏)가 동이족이라는 사실이 중국 고전에 기록되어 있다.
벌써 우리는 문자를 사용하였다는 증거물이 입증되고 있다.
고사변(古史辯)만 보더라도, 이 책은 우리가 쓴 책이 아니고 중국에서 나온 책입니다. 백화문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을 보면 "소호씨는 동이계야 (東夷系也), 동이지인 (東夷之人) 이라" 고 나옵니다. 뿐만 아니라 태호 복희씨 (太호伏犧氏), 여와씨 (女蝸氏), 소호금천씨가 전부 동이족이라는 것을, 중국 사람 자기네 손에 의해 밝힌 거다. 또 며칠 전에 조선일보에 한번 나온 적이 있죠. 요령성에서 5천년 전의 여신묘가 발굴됐는데 이 묘는 무덤이 아니라 사당입니다. 그리고 궁터도 발굴했다는데 이것들은 앞서 말한 당란이 발표한 유적보다 700년이나 더 이후의 것들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여러 가지 사실을 놓고 볼 때, 삼성기의 기록이 객관성이 있고 신빙성이 있다는 것이 고고학적으로 입증되었다면, 더 이상 무슨 반증이 필요하겠는가?
소호가 다스린 나라의 서울은 요동 반도에 있고, 산동 반도까지 다시 말해서 발해만 안쪽의 그 광활한 지역을 단군 이전에 벌써 통치하였다는 기록도 있는데, 5천년 전의 거대한 궁터가 발굴되었다면 이는 부족 시대 미개 사회에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죠. 강력한 정치 세력권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지금까지 중국 역사를 말하는 사람들이 주(周)나라 이전은 다 신화 시대로 몰아붙였지만 은허에서 갑골문이 발굴된 이래, 또 지금까지의 고고학적 발굴 성과를 볼 때 요(堯), 순(舜), 하(夏), 은(殷) 등의 역사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고, 신농씨(神農氏), 황제(黃帝)를 신화적 인물에서 역사적 인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될 입장에 놓여 있다.
그렇지만 이런 사실들은 이미 시전(詩傳) 서전(書傳) 맹자(孟子)를 보면 다 나와 있다. 그 가운데 정문으로 적혀 있다. 때문에 우리가 문헌을 볼 때에는 상당히 조심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식자우환이라고, 조금 안다는 학자들이 그 시대의 변천과 상황에 따라 그리고 자신의 이해 관계에 따라, 엄연한 역사적인 사실을 신화니 비과학적이니 하면서 호도 한다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다.
청동기 시대는 우리 나라의 지금까지의 역사서를 보면 청동기 시대는 위만 조선에서 시작 되었다고 한다 이것을 뒤집을 만한 자료 수집이 우리 나라는 남한이라는 한계점에 있어서 고조선의 수도인 하얼빈을 조사하지 못하였고 그 동안의 사대적 역사주의의 빠져서 그렇게 되었다. 다음을 글을 보면 생각이 달라질 것이다
지난 78 년 8.14 자 북한 중앙통신이 밝힌 바에 따르면 "우리 조선족이 청동기를 사용한 것은 서기전 2천년 경,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4천년 전이다. 그때 농가의 유적도 발굴했고 농기구와 오곡 씨앗까지 발굴했다." 고 했다. 그런가 하면 소련 학계는, 세계에서 가장 활발히 한국학을 연구하고 있는데, 거기에서 발간한 유 엠 푸진이 쓴 고조선 이란 책을 보면 "조선족은 4천년 전부터 청동기를 사용했다. 단군왕검이 있던 유적지도 발굴했고 단군 조선 시대 중앙 행정기관의 유적지도 발굴했다" 고 했다.
이렇듯 국내의 여러 문헌뿐만 아니라 국외의 학자들이 연구하고 발굴해서 우리의 역사 상한을, 그리고 단군 조선의 건국 사실을 고고학적으로 입증해 주는데도, 우리가 여기 앉아서 휴전선 이북을 못 가본다고 해서, 가서 발굴을 못해 보았다고 해서, 우리의 청동기가 3천년 이상 소급할 수 없다고 우기는 것은 납득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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