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화기극의 개념과 양식연구리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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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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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개화기 극의 개념과 양식연구
Ⅰ.서론
개화기(1894년 갑신정변 이후)부터 1920년대 한국에서 희곡 개념은 서구에서 말하는 문학(literature)의 드라마(drama)적 개념으로 변모하기까지 과도기적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희랍어 행동하다(dran, drama, dromenon)”에 어원을 두고 있는 드라마(drama)는, 18세기 이전까지는 연극(Thratre)의 쌍 개념으로, 18세기 이후에는 연극의 하위 갈래에 속하는 형식을 지칭하는 것으로 사용되었다. 오늘날에 이르러 드라마는, 좁은 의미에 있어서 연극의 쌍 개념으로 희곡문학이라는 의미로, 넓은 의미에서 있어서 희곡문학과 연극예술을 두루 포괄하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민병욱, 『한국근대희곡론』, 부산대학교 출판부, 1997, 7면.
유길준의 『서유견문』의 제16편 “놀고 즐기는 모습”의 각각 제11절과 제12절을 살펴보면, 그는 연행에 관하여 각각 연희(演戱)와 야희(野戱 : 서커스)로 구분하고 있는 것을 살펴볼 수 있다. 그는 연희에 관하여, “연극의 내용은 고금 역사의 유명한 사적들 가운데 사람들의 마음을 격동시키는 것과, 감동시키는 것, 기쁘게 하는 것, 즐겁게 하는 것 등을 나누어 비극과 희극의 두 가지로 구별한다.” 유길준 지음, 허경진 옮김, 『서유견문』, 한양출판사, 1995, 375면.
언급하고 있다. 이를 통하여 각각 서구 연극개념인 희극과 비극을 구분하여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또한 야희에 관하여, “이는 우리나라의 산두희(山頭戱: 산대도감)와 같은 것이다.” 위의 책, 375면.
라고 언급하는데, 연희(연극)과 야희(서커스)를 연행공간의 내외(內外)에 따라서 구분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유길준의 『서유견문』의 이와 같은 구분이 시사해주는 것은, 한국의 근대극의 형성과정에서 전통적인 구극(舊劇)과 구별되는 서구극사이의 차이를 발견하고 있다. 또한 이광수는『文學이란 何오』에서 문학의 종류를 형식적으로 구분하며 크게는 산문문학과 운문문학으로 구분할 수 있고 산문문학에는 논문, 소설, 극, 산문시로 구분할 수 있다고 논한다. 특히 극은 산문극과 시극으로 나뉘어 지고 “극의 목적은 소설의 목적과 함치하나니, 다만 소설은 문자로만 작자의 사상내의 세계를 표하되, 극에 지하여는 실지의 형태를 무대상에서 연함이니, 관자에게 감명을 흥함이 소설에 비하여 익심(益深)하니라.” 이광수, 『이광수 전집 1』, 삼중당, 1961, 513-514면.
라고 하고 있다. 이는 극과 소설을 구분하는 근거로 무대의 유무와 그 연행성에 있다는 점에 지적하고 있지만 소설을 무대에서 공연하면 연극이 된다는 논리에 기대고 있으므로 극이 지니고 있는 미학적 가치에는 다가가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한계를 지닌다. 이처럼 현대에는 서정(시), 서사(소설), 극(희곡)이라는 장르구분이 낯선 것은 아니지만 문학의 독립된 장르로 극개념의 형성이란 아직 낯선 것이었고 개화기부터 1920년대까지의 극개념 형성과정과 근대극의 연행형태는, 공연을 둘러싼 사회적 문화적 조건과 착종되어 나타난다. 사실상 연극 공연을 위하여 희곡 텍스트가 출현하게 된 것은 1912년 조일재의 『병자삼인』이 『매일신보』에 연재되면서부터 이며 이후로 번역 번안극이 무대에 올려 졌으므로, 근대극의 출발은 늦어지게 된다. 김상선에 의하면, “근대 희곡은 근대적 자아의 각성과 더불어 예술적인 향기를 풍기는 것으로 승화된 작품이어야 하며 근대 희곡의 대상이 되려면 개화기 희곡과 같은 계몽적이며 교훈적인 흔적이 완전히 그 자취를 감춰야한다” 김상선, 『한국근대희곡론』, 집문당, 1985, 47면.
고 언급하고 있다. 즉, 근대적 희곡의 개념의 근대성이라는 것은 계몽성의 탈각, 근대적 주체인 개인의 발견과 예술양식의 근대성에 있다고 보고 있다. 희곡 개념의 형성과 변화양상은 연극의 연행형태의 변화와 관련을 맺고 있으며, 연극을 둘러싼 당대적 사회조건은 극과 희곡 텍스트의 방향성을 제약하고 지시한다는 측면에서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다. 필자가 다루는 시기는 개화기부터 1920년대까지이며, 필자의 관심과 방향은 극의 연행형태와 그것을 둘러싼 사회적 여건 그리고 문학범주에서 희곡텍스트의 형성과정에 있다.
Ⅱ.본론
1.신연극운동과 배경
1896년 조선에서는 「한성 도로의 폭을 규정하는 건」을 중심으로 도시개조사업이 일어났다. 조선보다 먼저 근대화를 이룩한 일본의 발전에 고무되어 도시개조사업을 추진하여 근대적 의미의 도시를 형성시키고 국가공간을 근대화하려는 의도에서였다.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위에 오른 고종은 자신의 전제황권을 강화하고 근대화를 이룩한 서구열강에게 대외적으로 조선에 대한 자신의 전제권을 알리고 강화하기 위한 일환의 목적으로도 작용하였다.
이 도시개조사업의 과정 중에 1902년 고종의 칭경예식을 위해서 협률사가 설치되었다. 고종의 칭경예식은 서구의 황제들을 초대하여 어깨를 나란히 함으로써 자신의 전제권을 과시하려는 욕구에서 비롯한 것이었고, 이에 따라 협률사는 칭경예식을 지루함을 달래기 위하여 설치된 연희극장이다. 협률사는 고종의 신하 참봉 장봉환이 맡아 고종의 등극 40주년을 기념하여 내탕금 4만원을 가지고 만들어졌으며, 황실의 지원 아래 전국의 명창과 기생들을 모아서 전속단체를 구성하였고 1902년 12월 12일에는『소춘대유희』를 공연하면서 일반에 첫 공개를 하였다.
황실의 지원을 받아 전국의 1902년 협률사가 생겨난 이후 음력 9월 17일 칭경예식이 예정되었으나 1903년 4월 4일로 일정을 미루게 된다. 이유는 토사병이 창궐하여 다음 해로 연기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전국에 창궐한 전염병에 영친왕이 전염되어 칭경예식이 진행되지 못하고 다시 1904년 음력 8월 6일로 미뤄지게 된다. 그러나 1904년 2월 러일 전쟁이 발발하고 칭경예식은 거행되지 못한 채로 흐지부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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