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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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남한산성 가치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김영학, 『남한산성 역사 아카데미 7기』, 남한산성문화관광사업단, 광주, 2012, p.114-123
1) 축성기법
남한산성은 삼국시대 이래로 우리 민족사의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한강과 더불어 삼국의 흥망성쇠를 결정짓는 주요 지역으로 여겨졌으며, 백제가 한강 남쪽지역인 하남위례성에 도읍을 정한 이후로는 박제인들에게 남한산은 자신들을 보호해주고 지켜주는 성스러운 산으로 여겨졌다.
원성元城은 통일신라의 주장성 성돌을 활용하여 구축되었고, 외성外城은 원성과 시차를 두고 구축됨으로써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각 시기의 축성 기법을 특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여지도서』에는 ‘천작지성’이라 하여, “가운데는 평평하고 바깥은 험고하며 형세가 웅장하여 마치 산꼭대기에 관을 쓴 것 같은 형상”이라고 서술되어 있으며, 이중환의 『택리지』에서도 “안쪽은 낮고 얕으나 바깥쪽은 높고 험하여서 청이 처음 왔을 때 병기라고는 날도 대지 못하였고, 병자호란 때도 성을 끝내 함락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인조가 성에서 내려온 것은 다만 식량이 부족하고 강화가 함락된 때문이었다”라고 하였다. 해발 500m가 넘는 험준한 자연 지형을 따라 둘레 8km가 넘는 성벽을 구축하여 많은 병력으로도 쉽게 공략할 수 없는 지리적 여건을 구비하고 있는 남한산성의 내부는 넓고 평탄하며, 80여군데가 넘는 우물과 45개의 연못이 있을 정도로 물이 풍부하여 비축된 군량미만 충분하다면 수만 명의 병력도 수용이 가능할 정도였다.
구조적으로도 남한산성은 조선시대의 성곽이 갖추어야 할 구비시설을 대부분 갖추고 있으며, 원성 외에 봉암성, 한봉성, 신남성 등 3개의 외성을 갖추고 있다. 또한 남쪽에는 2개의 돈대가 있으며, 원성에는 5개의 옹성 및 20여개의 포루를 설치하여 화포 공격이 가능하도록 하였다. 이 외에도 성벽에 4대문 외에 16개의 암문이 있으며, 성벽 위에는 원총안과 근총안이 설치된 1940여개의 타로 구성된 여장이 있다. 성벽 안쪽에는 125개에 달하는 군포가 구축되어 있었으며, 군포와 군포 사이에는 90여 곳에 소금을 묻어 둔 매염처와 숯을 묻어 둔 매탄처가 있었고, 성내에는 유사시에 대비하여 충분한 식량과 군수물자가 보관되어 있었다.
이러한 까닭에 남한산성이 1894년에 산성 승번제도가 폐지되고, 일본군에 의하여 화약과 무기가 많다는 이유로 1907년 8월 초하루 아침에 잿더미로 변하고 말았지만, 여전히 남한산성 주변에는 수많은 문화유산들이 존재하고 있다.
2) 성곽 구조
① 체성(성벽)
남한산성은 산지 지형을 이용한 편축성으로 축조함으로써, 협축성에 비해 축성할 때에 필요한 인력과 자재를 절반으로 줄이고 축성기간도 획기적으로 줄이는 과학적이고 효율적인 축성을 하였다. 편축성의 구조는 성내 시설의 활용 면에서 병력의 신속한 배치와 이동병력의 은폐 등의 편의성은 협축성에 비해 우수함과 동시에 성벽 내부에 편축으로 인해 조성되는 넓은 공간은 성곽 관련 시설 마련에 더욱 우수한 구조였다.
문헌기록이나 발굴과정을 통하여 확인되고 있는 사항에 따르면, 성벽은 편축성의 축조방식으로 축조되었으나, 성벽은 성돌의 크기와 형태 등 가공방식에 따라 다양한 형태의 성벽으로 구분되어 보인다. 인조 대와 그 이전의 원성지역에 남아있는 축성방식은 장방형으로 가공된 성돌로 평축형식으로 축조하였고, 숙종 대는 규격이 다소 큰 깬돌을 사용함으로써 평축형식이 아닌 난층쌓기 방식으로 성돌 사이에는 쪽 돌이 많이 사용된 특징을 보여준다. 그 외 영조 대는 전면적인 수리를 한 시기에 축조된 성벽으로 장방형 성돌이기는 하나, 그 크기와 축조방식이 다르게 나타난다.
또한, 중원문화재연구원이 2005년 발굴 조사한 4암문 및 수구지 일대에서 발견된 조선 시대 이전(주장성) 성곽은 대부분 조잡한 가공석 내지는 마름돌에 속할 정도로 성돌 하나하나에도 많은 공을 들여 축조하였고, 성벽의 내부는 예외 없이 좁고 길쭉한 돌(장방석)을 길이 방향으로 쌓았으며 내벽과 생토면 사이의 공간은 판축을 하듯이 점토나 사질토로 다져서 성벽으로 물이 스며들지 못하게 할 뿐 아니라 성벽의 안정성도 높여 축조하였다. 현재 남한산성은 지속적으로 복원 정비가 추진되고 있으며, 2012년에는 계속적인 발굴조사 및 정밀실측조사를 통해 사업이 진행될 예정이다.
참고문헌
※ 참고문헌
광주시, 『광주시사』, 광주시사편찬위원회, 광주, 2010
김영학, 『남한산성 역사 아카데미 7기』, 남한산성문화관광사업단, 광주, 2012
조병로 외, 「남한산성의 역사적 가치와 현대적 의미 재조명 공개 세미나」, 경기개발연구원, 2008
최완기, 「남한산성의 역사 지리적 고찰과 천주교 신앙의 전파」, 『교회사학 제1집』, 수원교회사연구소, 2004
남한산성문화관광사업단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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