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본주의 Fundamental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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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근본주의 Fundamentalism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근본주의(Fundamentalism)
I. 들어가는 말
근본주의(Fundamentalism)를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어렵다. 근본주의란 용어는 역사적으로 19세기말과 20세기 초의 미국 개신교 내의 보수적 종교운동을 가리키던 말인데, 이제는 정통적인 것을 수호하는 모든 종교적인 부흥 운동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Martin Riesebrodt, "근본주의와 종교의 부활(Fundamentalism and the Resurgence of Religion)", 신학사상 2001년 봄, p. 118-119
실제로 우리는1970년대 이후 세계 각 종교들의 부흥을 목격하고 있으며, 그것은 근본주의 운동을 중심으로 활성화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필자는 이처럼 근본주의란 용어가 기독교의 영역을 넘어서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점을 염두해 두면서, 본 글에서는 근본주의를 개신교의 범주로 한정해서 그 역사적인 고찰을 시도하고자 한다. 또한 개신교 근본주의의 역사적 발전과정과 더불어, 중요한 신학적인 특징들에 대해 소개하고, 근본주의가 미친 영향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II. 미국의 근본주의
1. 역사적 배경
19세기의 미국 개신교는 안으로는 위대한 부흥을 경험하면서, 밖으로는 근대 비판적 사고의 결과로 나타난 여러 도전들에 직면해 있었다. 신앙의 자유를 찾아 유럽을 떠나 북미로 이주한 신앙 공동체들은 자신들의 신념을 철저히 지키기 위해 배타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는데, 이러한 전통주의가 교회 외적으로는 근대 과학의 성과로 인한 진화론의 주장들과, 교회 내부적으로는 자유주의에 영향을 받은 성서 고등 비평으로 위협을 받고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는 19세기말에 인해 절정에 달했고, 보수주의 진영의 행동을 촉구하게 되었다.
1895년 프린스턴 출신의 목회자들과 존 다비 (John Darby)의 영향을 받은 전천년주의자들이 모인 나이아가라 회의에서 근본원리들(Fundamentals)라고 불리는 기독교 신앙의 5대 원리(성경무오설, 예수의 동정녀 탄생, 예수의 신성, 예수의 대속, 예수의 육체적 부활과 재림)를 선포했다. 이어서 1910년 미국 장로교회는 나이아가라 회의의 원리들과 거의 동일한 5개항-1) 성경무오설, 2) 예수의 동정녀 탄생, 3) 예수의 대속, 4) 육체의 부활, 5) 기적의 진실성-을 선언하였다. 이러한 운동을 전개한 이들은 1911년 근본주의 (The Fundamentals)라는 12권의 소책자를 만들어, 막대한 비용을 들여 미국 내 거의 모든 교회에 배포했다.
근본주의자들은 20세기의 처음 25년 동안은 매우 활발하게 활동하며 거의 모든 개신교 교파를 지배했고, 자유주의자들을 신학교와 교회에서 몰아내려고 하였다. 그러나 1925년 학교에서 진화론을 가르칠 수 있는가에 대한 논쟁을 기점으로, 근본주의자들은 자유주의자들과의 논쟁에서 잇달아 패하고 말았다. 자유주의자들이 다시 일류 신학교들을 차지하게 되면서 근본주의의 논쟁은 수면 밑으로 가라앉는 듯 했다.
근본주의 운동의 약화를 다시 활성화시키려 노력한 사람은 존 그레샴 메이첸(John Gresham Machen)이었다. 메이첸은 1923년에 쓴 "기독교와 자유주의 (Christianity and Liberalism)"이란 책에서 자유주의를 기독교가 아닌 전적으로 다른 부류의 종교라고 비방했다. 이양호, 근본주의에 대한 신학적 평가, 기독교 사상 1995년 3월호, p. 25
그는 1929년 자신이 가르치던 프린스턴 신학교(Princeton Seminary)를 떠나 웨스트민스터 신학교(Westminster Seminary)를 세웠으며, 다른 보수적 장로교회와 합하여 독립 선교부를 창설했는데, 1936년 총회에서 독립 선교부의 인정을 거부당하자, 새로운 교파인 미국장로교회(The Presbyterian Church of America)를 세웠다. William E. Hordern, 평신도를 위한 프로테스탄트 신학개요, p. 75
근본주의가 큰 교파들로부터 거부를 당하고 내부적으로 분열을 겪으면서, 역사 속에서 사라지는 듯했다. 그런데, 2차 세계 대전 후 1940년대 후반부터, 풀러 신학교(Fuller Theological Seminary)의 카넬(E. J. Carnell)을 중심으로 다시 부흥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이때부터 보수주의적 신학적 부흥은 초창기의 근본주의와는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들은 근본주의적 전통에 서 있으면서도 근본주의 운동의 배타성을 어느 정도 극복한 온건한 보수주의자였다. 이들은 지성주의를 표방하고 창조와 진화를 연결하려는 노력을 했는데, 이것은 보수주의 안에서 현대 과학을 수용하려는 시도였다. 한편 이러한 온건적인 보수주의자들에 대한 반발로 보다 수구적인 신근본주의가 등장하게 되었다. 따라서 보수주의자들은 신근본주의자들과 구분하기 위해 스스로를 복음주의자라고 부르게 되었다.
근본주의는 1970년대 이후 종교의 부흥 운동이라는 맥락에서 여전히 미국 개신교에 강력한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세계화의 물결 속에서 여러 지역의 교회들 속에서 침투해 들어갔다. 한국 개신교도 선교 초기에 근본주의적 성향의 선교사들의 영향으로 근본주의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고 일련의 신학논쟁을 통해, 근본주의가 대부분의 개신교 교회들을 장악하게 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후에 다시 논하도록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