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 대중문화 - 홍콩영화의 전성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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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80년대 대중문화 - 홍콩영화의 전성기 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80년대 대중문화
(홍콩영화의 전성기)

최근 동아시아에서 한류의 열풍이 거세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몇 주전 배용준이 자신의 사진전을 위해 일본을 방문했을 때 나리타공항에 그를 보기 위해 약 6000여명의 여성들이 몰렸고 일본 각 방송사는 배용준을 취재하기 위해 헬기까지 동원했다는 사실을 봐도 ‘한류’의 열풍을 새삼 확인 할 수 있을 것이다. 동아시아 중에서도 특히 중국과 일본은 한국과 역사적으로나 지리적으로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다. 중국은 2000년도부터 한국 드라마와 음반이 큰 호응을 이끌면서 ‘한류‘라는 단어를 생성하는데 큰 일조를 했고 일본은 작년부터 NHK에서 방영된 {겨울연가]라는 드라마를 통해 동아시아의 ’한류‘열풍에 동참하게 되었다. 이러한 ’한류‘는 역사적으로 국가 간에 겪은 민족적 감정에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점 때문에 동아시아 {대중문화}에 큰 획을 그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한류‘에도 잇따른 사고와 문제점이 제기 되고 있다. 지나치게 과장된 부분은 없는지에 대한 반성과 우려와 더불어 전문가들은 과연 ‘한류’가 동아시아 대중문화의 흐름에서 지속적인 중심역할을 할 수 있을지 혹은 80년대 ‘홍류’처럼 되진 않을지에 대한 의견이 나오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80년대 대중문화 중에서 ‘홍류’를 선택하면서 당시 사회적 배경상황과 대표적인 홍콩영화들을 조사하고 더불어 ‘한류’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모색해보기로 했다.
1) 80년대 한국의 대중문화
1980년대 우리나라는 민주화의 이름을 대신하여 폭력과 억압 속에 숨쉬고 있었고 당시, 『제 5공화국의 문화 정책으로 80년대 대중문화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 번째로는 문화 정책의 폭력성을 들 수 있다.광주의 원죄를 안은 채 출발한 5공화국 권력은 스스로 정당성이 취약함을 너무나 잘알고 있었고 따라서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폭력적 통제와 교묘한 의식조작을 뒤섞은 다양하고 체계적인 문화정책을 구사했다. 문화정책은 하나의 방향을 강제하고 장려하는 의도적 육성의 정책과 일정한 테두리를 벗어나는 행위를 통제하고 가로막는 체계적 배제의 정책으로 구성된다. 5공화국의 문화정책의 폭력성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정권 초기에 있었던 이른바 언론 통폐합이다. 이 조치로 신아 일보가 경향신문에 강제로 흡수됨으로써 중앙 일간지가 7개에서 6개로 줄었고 경제지가 4개에서 2개로 지방지가 이른바 1도 1지의 원칙에 따라 14개에서 10개로 줄었다. 이미 일제시대부터 이어온 대중문화에 대한 검열 역시 시종 강력히 시행되었고 국가보안법, 집시법 등 문화예술과 관련이 없는 법적 장치들도 수시로 문화활동을 통제하는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이 같은 통제와 억압에 의해 5공 치하에서 수많은 문화 예술인 출판인 언론인들이 고초를 겪어야 했고 수많은 서적이 판금 당해야 했다. 두 번째로는 대규모 이벤트의 유치와 정치적 이용을 들 수 있다. 80년 봄의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서울에서 벌어졌던 미스 유니버스대회를 비롯해 81년 국풍 81 그리고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 유치가 대표적이다. 집권세력은 올림픽 개최는 곧 선진국이라는 기묘한 공식을 내세우며 대회 유치를 자신들의 치적으로 내세웠고 질서와 화합이라는 명목 아려 강력한 통합과 억제의 수단으로 이를 이용하였다. 세 번째로는 독점자본의 문화 진출이다. 독점 대기업의 이익을 보호하는 과정에서 컬러 TV방송이 전격적으로 실시된 것은 대표적인 예가 된다. 전량 수출하던 컬러 TV수상기가 외국의 무역장벽으로 인해 수출에 어려움을 겪게 되자 컬러 방송을 조기 실시함으로써 컬러 TV수상기의 내수시장을 확보해 준 것이다. 대기업들은 정부의 보호 아래 소비적 문화산업에 본격적으로 진출하게 되는 데 대표적인 분야가 스포츠 산업이다. 5공 정부는 한때 스포츠 공화국이라는 비아냥거림을 들을 정도로 스포츠 활동에 집중적인 지원을 했는데 프로스포츠의 도입이 대표적이다. 1982년 프로야구가 시작되어 국민적 관심을 끄는데 성공하자 이어 프로씨름과 프로축구가 등장했고 준 프로라 할 수 있는 농구의 점보시리즈와 배구 대제전이 출범했다 프로스포츠의 열기는 올림픽과 함께 대기업들의 새로운 상품시장개척에 일익을 담당하게 되는데 운동화 등의 스포츠용품 시장과 레저산업이 이 시기에 급속히 성장하게 된다. 따라서 5공화국 시기 대중 문화는 향락 문화의 산업화로 인해 80년 내내 불법 비디오 외설 영화 유흥산업을 둘러싼 시비가 계속 되었고 후반으로 넘어오면 마약문제 과소비 문제 등과 함께 심각한 사회문제로 표출되었다. 이것은 비민주적 정권에 의해 추진되어온 고도성장 정책이 원인이라 할 수 있는데 독점자본 위주의 고도성장 정책과 함께 대외 의존적이고 불균형적인 경제구조가 배태되었고 그 속에서 접대 경제의 만연. 투기와 불로소득의 팽창 특히 문화에 대한 정치적 통제가 극심했던 까닭에 향락문화는 공식적으로 드러나지 않은 채 지하에서 음성적인 형태로 번성했고 그래서 더욱 사회적인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1980년대의 두드러진 현상은 10대 청소년 문화시장의 등장이다. 3공화국 이래 지속된 고도성장의 경제성장 정책은 대도시를 중심으로 상대적으로 소득이 높은 중산층을 형성하였다. 이른바 강남지역으로 대표되는 중산충 출신의 청소년들은 부모로부터 받은 용돈을 기반으로 상당한 정도의 구매력을 갖춘 소비계층으로 등장하게 된다. 이들은 나이키 운동화를 사 신고 자신이 좋아하는 가수의 음반을 사고 콘서트를 보러 오게 됨에 따라 대중문화시장의 판도는 변화하기 시작했다. 이른바 오빠부대가 등장하여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기 시작하는 것이 이때부터이다. TV쇼프로그램은 10대 취향의 댄스가수들로 채워지기 시작했고 이는 80년대 후반으로 가면서 더욱 극심해진다. 가창력보다 춤 솜씨와 외모를 무기로 삼는 이른바 비디오형 가수들이 양산되기 시작했다. 10대 취향의 대중음악들이 음악적으로나 외형적으로 외국의 팝송과 거의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유사한 모습을 띠게 되었다.
이와 같은 현상은 고급문화의 몰락을 초래하였는데, 80년대 초반가지 자주 공연되었던 부조리극 계열의 모더니즘 연극은 당시 공연자들에게나 관객들에게나 일종의 엘리트 의식을 전제로 했던 고급 문화적 행위였다. 그런데 이런 류의 연극은 80년대 중반을 거치면서 차츰 자취를 감추게 된 것이다. 대신 살아남은 것들은 아가씨와 건달류의 상업주의 연극들 뿐 이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문화코드는 떠오르는 법이다. 1980년대 중반에 젊은 감독들의 작품 활동이 활발하여 외국비평가들로부터 한국의 새로운 물결(The Korean New Wave)이 일고 있다는 평을 듣기도 했고, 박광수 감독의 《칠수와 만수》, 이명세의《첫사랑》, 장선우의《우묵배미의 사랑》등이 그것이었다. 1980대 후반과 90년대 초반은 한국영화의 중흥기로서 각종 세계영화제에서 수상기록을 남겼는데, 89년 로카르노 국제영화제에서 작품상을 수상한 배용균 감독의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을 비롯, 임권택 감독의《씨받이》《아제아제바라아제》《아다다》는 각각 베네치아국제영화제, 모스크바국제영화제, 몬트리올국제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였다. 그러나 한국영화 예술은 많은 문제를 안고 있었다. 제작과 흥행, 그리고 배급을 위한 질서가 갖추어져야 컬러텔레비전과 스포츠 붐, 그리고 다양해진 레저 붐의 틈바구니에서 영화는 소생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점을 극복하지 못하고 90년대로 넘어오기까지 우리의 영화시장은 홍콩영화와 헐리우드 영화 수입에 크게 국한되어 있었고, 영화산업의 기반은 흔들렸다.
2) 80년대 홍콩영화의 붐
1980년대, 많은 사람들이 홍콩영화에 열광적인 반응을 보였다.『84년 6월 영국의 수상이었던 마가렛 대처가 영중수교 협약에 따라 홍콩을 중국에 반환한다고 약속하면서 홍콩은 혼란으로 치달렸다. 그저 구경거리였던 홍콩영화는 또 한번 그저 구경거리로 환골탈태하면서 97년으로 향하는 시대정신을 거기에 담았다. 갑자기 홍콩영화는 칼 대신 총이 난무하는 홍콩 느와르와, 죽은 귀신이 살아나는 강시 이야기와, 중국고전 괴담을 영화로 담은 귀신과의 로맨스 이야기가 주류를 이루었다. 이것은 폭력과 죽음에 대한 영화가 아니다.「영웅본색」과「강시선생」그리고「천년유혼」은 "놀랄만큼 정확하게 홍콩사람들의 마음을 담았다"고 홍콩 영화평론가 쉬케이는 말한다.』
(출처: http://my.dreamwiz.com/dorati/mal/mal199511.htm)
즉, 이 시기의 홍콩영화는 불투명한 세상을 벗어나고픈 사람들의 이야기가 영화의 꾸준한 테마를 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이야기 속에 인간이기에 가지고 있는 대립과 갈등을 일종의 증폭제로 깔아두고 있다. 때문에 홍콩 사람들은 이러한 영화를 보면서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느꼈을 것이다. 꽉 매인 도시 속에서 탈출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그들과 똑같은 내면적인 갈등을 겪고 있는 영웅의 모습에 자신을 투영시켜 마음껏 자유를 누린다. 진정한 의리가 사라지고 있는 현실 속에서 영화를 통하여 우정과 사랑. 의리를 찾는다. 그러나 영화가 끝나고 현실로 돌아왔을 때는 그들에게 남는 것은 허무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또 다시 영웅을 그리워하게 된다. 물론, 이것은 홍콩 상황에만 맞아들었던 게 아니었다. 어쩌면 암울했던 우리시대가 그 이상으로 원하고 갈망했던 소스였을 것이다. 영화는 하나의 산업이다. 그래서 홍콩인들의 의식을 잘 분석하고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적적한 시기에 공급한 것이 홍콩 느와르다. 한 때, 홍콩은 한국영화의 주요 수출국 중 하나였다. 그러나 한국영화가 침체기에 빠져 호스티스류의 영화를 만들고 있을 때 홍콩영화는 쿵후에 기반한 혁신적인 액션으로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 시장 뿐 아니라 전 세계로 뻗어나갔다. 바로 홍콩영화의 황금기인 80~90년대 중반까지는 한국에서도 홍콩영화 마니아가 가장 많았던 시기이고,홍콩 느와르라는 신조어도 이때 만들어졌다. 이렇듯 홍콩의 액션영화에 대한 새로운 명칭을 만들어낼 만큼 홍콩영화는 한국 시장을 점령했었다. 그 당시 과 을 반복 감상하던 청소년들의 모습에서 한국 최초이자 (현재까지는 유일했던) 컬트 현상으로 설명했다. 우연히 과 을 재 개봉관에서 발견해 낸 소년, 소녀들은 입 소문을 통해 영화의 실체와
참고문헌

문화 운동론2 김정환저
대중음악의 뿌리 선성원 저
대중문화의 이해 김창남저
80년대의 문화와 문화운동 김창남 저
현대 대중문화의 형성 강현두
우리대중문화 길찾기 강준만 저
현대 중국의 연극과 영화 강계철 외 지음 2003.5.9
중국영화사 슈테판 크라머 지음/황진자 옮김 2000.10.25
중국영화 백년의 역사 차이나시네마 류홍스,슈샤오밍 지음/김정욱 옮김 2002.8.30
중국무협영화Ⅰ,Ⅱ 오현리 지음 2001.8.16
(인터넷 검색 자료는 인용문 뒤에 출처를 적어놓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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