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현학 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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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과학과 현학 논쟁
1. 논쟁의 배경 - 신문화 운동과 5.4 운동
①신문화운동
신문화운동은 1915년에 진독수(陳獨秀)가 ‘신청년’을 창간하면서 이대교(李大釗), 호적(胡適), 노신(魯迅)등과 같은 진보적인 지식인계층이 중심이 되어 전통문명과 전통문화를 통렬하게 비판하면서, 정신혁명윤리혁명문화혁명을 통하여 신 중국을 건설하려고 한 지식인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의 주장을 조금만 살펴보자면 다음과 같다. 진독수는 ‘신청년’의 창간호에서 “청년에게 삼가 고함” 이란 글을 통해 중국 젊은이들에게 노예적, 보수적, 도피적, 쇄국적, 허식적, 공상적인 것을 그만두고 자주적, 진보적, 진취적, 세계적, 실리적, 과학적으로 행동해 줄 것을 요청했다. 즉 썩은 구사상에 중독된 사람들은 더 이상 세계의 대세에 적응할 수 없고 자각한 청년만이 멸망에 직면한 중국을 건질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구사상의 근간인 유교를 격렬하게 비판하였다. 노신은 유명한 ‘광인일기(狂人日記)’에서 인의도덕(仁義道德)을 강조하는 “유교야말로 사람을 잡아먹는 것”이라고 역설하면서 중국의 젊은 세대를 유교의 해독으로부터 구해내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 ‘중국사상계의 도로청소부’라고 일컬어지는 오우(吳虞)에 의하면, 유교는 중국의 전제정치와 권위주의적 가족제도의 근간이 되어왔으며 “그 해독은 진실로 홍수와 맹수보다 더하다”고 강조하면서 유교적 전통의 타파를 역설하였다.
이와 같이 신문화운동은 중국의 지식인들, 특히 청년지식인들에게 충격적인 영향을 주었다. 호적은 신문화운동을 계기로 중국의 지식인들은 “가치의 전도”를 경험했으며 모든 기존의 가치에 대한 회의와 비판을 제기하게 되었다고 지적하면서, 이 운동을 ‘중국의 르네상스’에 비유하였다. 따라서 이시기에 중국의 청년지식인들은 신문화운동의 비판정신, 탐구정신에 영향을 받아 새로운 사상과 문화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신문화운동은 특히 젊은 지식인들로 하여금 비판적인 서구의 급진사상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했을 뿐만 아니라, 각종 사상운동단체를 조직하고 중국의 정치적사회적 현실문제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자신들의 견해를 적극적으로 발표할 수 있게 하였다. 이런 점에서 신문화운동에 의하여 각성하고 자극을 받은 젊은 지식인들이 중심이 되어 당시 중국이 당면했던 절박한 위기상황, 즉 제국주의적 침략과 군벌정권에 대한 국민적인 항의운동으로 발전한 54운동은 신문화운동의 연장선에 있다고 하겠다.
②5.4운동
54운동은 신문화운동에 의하여 각성된 청년지식인들이 중심이 되어 전개한 최초의 국민적 반제반봉건운동이란 점에서 신문화운동의 정신을 계승, 발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5.4운동은 파리강화회의에서 중국의 요구가 묵살됨에 그 발발원인이 있다. 중국은 중국대표를 보내어 열강의 중국에 대한 특수권익에 대하여 (1)중국에 설정된 세력범위의 포기 (2)중국에 주둔하고 있는 각국 군대의 철수 (3)각국이 중국에서 경영하고 있는 우편, 전보사업의 이양 (4)영사재판권의 폐기 (5)조차지의 반환 (6)조계의반환 (7)관세자주권의 승인 등 7개 항목의 희망조건을 제출하고 1차 대전 중에 얻은 일본의 각종 특수 권익의 반환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이 요구는 각국의 승인을 얻지 못하였고 전후 독일이 중국에서 얻은 권익을 일본이 인계할 것을 결정하였다.
결과를 전해들은 중국 국민들은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이에 북경대학학생들을 중심으로 하는 학생 5천명이 봉기하게 된 것이다. 이들은 밖으로는 국권을 회복하고 안으로는 국적을 응징하며 청도를 탈환하고 21개조 요구를 폐지하며 일화배척하고 평화조약 조인거부 등의 슬로건을 내세우고 일대 시위에 감행하였다. 이들은 21개조의 책임자인 조여림의 집을 습격하고 주일공사 장종상을 구타하였으며 5일에는 북경의 전체학생들이 동맹휴학을 단행하였고 6일에는 중학이상의 북경연합회가 결성되었다. 7일에는 일본상품 배척집회가 열렸으며 전국 곳곳에서 집회와 데모가 벌어졌으며 학생들은 일반 대중들을 계몽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정부의 탄압은 곳곳에서 일어났으며 이는 학생운동에 강한 반발을 사게 되었으며 이후 학생들은 조국의 위기를 부르짖으면서 일본상품배척국산품 장려 운동을 전개하였다.
2. 논쟁의 시작 - 장군매의 자유의지론 vs 정문강의 과학적 인생론
5.4 신문화운동의 주요 구호였던 과학과 민주라는 것이 크게 확산되고, 그것은 당시 문화 사상계에 절대적인 권위와 확고한 자리를 잡게 되었다. 이 때에는 어느 누구도 공개적으로 덕선생과 새선생을 반대하거나, 또한 감히 이를 공격하고 나설 사람이 없을 만큼 당대를 휘어잡고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5.4 학생 애국시위 운동 직후 양계초가 ‘과학파산론’을 제기하였던 것이 고작이었다. 즉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파리 강화희의가 열리자 양계초와 정문강등은 중국 대표단의 장외 고문으로 유럽을 방문하게 되었다. 이 때 전후 유럽의 참담한 파괴 상황을 보고 돌아온 양계초는 귀국하자마자 『歐遊心影錄』(구영심영록)을 발표하였다. 여기에서 양계초는 과학과 그리고 과학이 인생관에 나쁜 영향을 끼친다고 하면서 “유물파들은 과학에 근거하여 순물질적, 순기계적 인생관을 만들고 있으며, 인류의 자유의지를 부인하고 있는데 이는 현재 사상계의 최대 위기”라고 지적하였다. 그리고 그는 계속하여 과학의 죄상을 나열하고 믿을 수 없는 것이 과학이라고 선전하였기 때문에 전 사회의 사람들은 모두 회의와 번민과 두려움에 빠져 마치 나침반이 없는 배가 바람과 안개를 만나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를 모르는 것과 같이 되었다. 사실 양계초의 ‘과학 파산론’은 당시 과학에 미쳐 있으면서 과학만이 살길이라는 중국의 신문화운동 분위기에 큰 파문을 일으킬 수 있었다. 또한 양계초의 이러한 관점은 신문화 운동을 반대하고 과학을 두렵게 보는 보수 세력에게 큰 힘이 되어 주었다. 양계초의 과학파산론에 힘입어 과학과 현학논전의 단서를 제기한 사람은 바로 장군매이다.
현학(玄學)은 형이상학을 뜻한다. 즉 성리학이나 양명학 같은 전통적인 도덕 형이상학이다. 장군매는 그러한 중국의 전통적 가치가 깨어지는 것을 원치 않았기에, 과학은 인생관을 지도할 수 없으며 오직 현학만이 인생관을 제시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렇게 해서 그는 전통 유교를 옹호한 것이다. 반면 장군매의 이러한 현학적 인생관에 대한 반동으로 과학적 인생관을 주장한 사람이 정문강이다. 과학과 현학 논쟁은 이 두 사람의 거듭되는 논쟁에서 출발하여 점점 확대되어 갔다.
장군매는 1923년 2월 14일 청화대학에서 「인생관」이란 제목으로 강연하고 이를 『청화주간』 272기에 발표하였다. 여기에서 장군매는 과학이 인생관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을 과학과 인생관의 차이점 다섯가지를 들면서 강조하였다. 첫째, 과학은 객관적이고 인생관은 주관적이다. 둘째, 과학은 논리적 방법에 의해 지배되지만 인생관은 직관에서 나오는 것이다. 셋째, 과학은 분석의 방법에서 출발할 수 있으나 인생관은 종합적인 것이다. 넷째, 과학은 인과율에 지배되나 인생관은 자유의지적인 것이다. 다섯째, 과학은 대상의 같은 현상에서 나오는 것이나 인생관은 인격의 단일성에서 나온다. 이러한 맥락에서 “과학은 반드시 일정한 원리 원칙이 있으며 이 원리 원칙에는 모두 증거가 있다”고 하였으며, “인생은 서로가 관찰하는 것이 다르기 때문에 또한 의견도 다르기 때문에 가장 통일이 안 되는 것이 인생관”이라 전제하고, 과학은 인생관을 지배할 수 없으며 단지 현학만을 가지고 인생관을 해석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이러한 장군매의 인생관은 유럽 문화 파산론과 연계된 것으로서 인생관 제기는 단수하게 제기된 것이 아니라 당시 신문화운동의 사조에 대하여 하나의 반대를 나타내는 표현이었다. 즉 장군매는 인생관의 객관적 표준을 부인하고, 사람의 의지는 객관적 물질의 반영이라는 것을 부정하고, 의지의 만능을 선양하여 의지가 모든 것을 결정하며, 목적은 과학적 인생관을 수립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또한 인생관의 특징이란 주관적이고 즉각적이고 종합적이고 자유의지적이고 단일성을 가져야 한다고 하였다. 그래서 과학이 아무리 발달하였다 하여도 인생관의 문제는 과학이 해결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장군매의 자유의지의 인생관은 주관적 유심주의 세계관이 기초가 되는 것으로 장군매가 보기에 물질과 정신은 객관적 표준이 없는 것으로 세계는 불변한 것이지만 개인의 정신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항상 변하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개인의 의지는 자유로운 것으로 객관적 세계가 만든 제약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과학적인 인과법칙을 완전히 부인하고 심지어 인류 사회 발전의 규율성마저 부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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