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식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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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조식 철학
1.조식의 시대의식
조식이 생존했던 시대(1501~1572)는 전후 50년 사이에 이른바 4대사화가 연이어 일어나 사기士氣가 극도로 몰락한, 유교의 덕치가 제대로 시행될 수 없는 정치적 혼란기였다. 연산군 때 일어난 갑자사화와 무오사화는, 세조의 왕위찬탈에 동조하지 않아 죽임을 당한 집현전 유학자들의 영령을 현양하고자 했던 의리파 선비들의 역사바로잡기 운동을 막기 위해 일어난 것으로, 이로 인해 결국 연산군은 폭군으로 몰려 왕위에서 쫓겨났다. 그리고 이른바 중종반정으로 새로운 정치권력으로 부상한 훈구세력과 이에 맞서 유교의 지치주의를 이상으로 삼아 대대적인 개혁정치를 주장하던 조광조趙光祖를 필두로 한 신진사류 간의 싸움에서, 중종의 배신으로 신진사류가 도륙을 당하는 기묘사화가 일어났다. 이 기묘사회 때 조식은 벼슬길에 있던 숙부를 잃고 관로官路에 혐오를 느끼기 시작하였다. 이후 정계에서 왕성하게 활약할 수 있던 시기에 또 다시 사화가 일어난다. 이번에는 훈구세력에 이어 외척의 발호를 부르게 된 어린 명종의 몽매함과 정치를 모르는 문정왕후의 섭정 및 이를 기화로 사욕과 보복에 눈이 어두워진 벼슬아치와 외척들의 쟁투의 틈에서, 이에 항거한 명망 있는 선비들을 참살하는 을사사화가 일어난 것이다. 이때 조식은 대사간大司諫 이림李霖, 사간司諫 곽순珣郭, 참봉參奉 성우成遇, 및 직필사관直筆史官으로 유명한 안명세安命世등의 친우를 잃었다. 특히 사화의 여파로 인한 규암圭庵 송인수宋麟壽의 죽음을 듣고는 위位를 세우고 통곡하기도 했다. 이를 계기로 현실정치에 대한 기대를 완전히 상실한 조식은 학문과 수행 및 후진교육에 전념하면서, 때로 우레와 같은 소리로 조정을 질타하기도 했다. 김충열, 남명 성리학의 특징 1: 자득과 실천, 남명학연구원, 『남명학연구원총서』 1권 0호 ,(2006)
2.조식과 이황
16세기 중엽의 혼란스러운 시대에 등대 역할을 할 수 있는 인물은 조식과 이황이었으며, 유학계에서는 이들을 양대 종사宗師로 추앙했다. 이 둘은 공교롭게도 같은 해(1501)에 같은 영남에서 태어났으며, 낙동강을 사이로 조식은 우측(경상남도)에서, 이황은 좌측(경상북도)에서 학계를 이끌었다. 당시 이름난 학자 중에 이들의 문하에 출입한 이가 적지 않았다. 그런데 또 이들은 공교롭게도 처세관과 학문의 길이 상당히 맞섰다. 이황은 벼슬에 나아가 군왕을 섬긴 반면 조식은 초야에 묻혀서 민생을 걱정하고 정치를 비판했다. 또 이황은 당시에 성리학계의 정통으로 받들리던 주자학을 깊이 있게 연구하면서 불교의 선이나 도가 및 양명학을 이단시 하였다. 반면 조식은 원시유교에 뿌리를 두고 성리학의 선구자들인 주돈이, 소옹, 장재, 이정 형제 등 이른바 북송오자北宋五子의 학설을 폭넓게 계승하면서, 한편으로는 불교나 노장 및 제자백가에 대해서도 상당히 포용적인 입장을 보였다.
둘은 서로 가까이 살면서도 만난 적은 없었다. 다만 서로 편지를 통하여 각자의 생각을 주고받았는데 조식은 이황에게 다음과 같은 서신을 보냈다. 김충열, 남명 성리학의 특징 1: 자득과 실천, 남명학연구원, 『남명학연구원총서』 1권 0호 ,(2006)
근자에 보건대, 학자 중에서 손으로 쓸고 닦는 예절도 모르면서 입으로는 천리를 논하 는 자가 많습니다. 선생께서는 큰 어른이시니 야단쳐 막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야 아무 가진 것이 없고 찾아오는 사람도 드물지만, 선생께서는 높은 위치에 계시어 우러 러 모시는 이가 많을 것이니 십분 억제하실 수 있지 않겠습니까? 김충열, 남명 성리학의 특징 1: 자득과 실천, 남명학연구원, 『남명학연구원총서』 1권 0호 ,(2006)
이때는 바로 이황과 기대승奇大升의 사칠논쟁四七論爭으로 학계가 온통 논쟁을 위한 논쟁에 휘말려 있던 시기였기 때문에 조식이 일갈한 것이다. 한편에서 논쟁을 꺼리는 조식에 대해 학문이 부족하기 때문일 것이라고 하는 이가 있자, 조식은 오건吳健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김충열, 남명 성리학의 특징 1: 자득과 실천, 남명학연구원, 『남명학연구원총서』 1권 0호 ,(2006)
나는 평생 다른 일은 모르고 책만 읽어 왔다. 만일 입으로 천리를 떠들고자 한다면 어찌 남들만 못하겠는가? 쓸데없는 입씨름에 말려들기 싫어서이다. 김충열, 남명 성리학의 특징 1: 자득과 실천, 남명학연구원, 『남명학연구원총서』 1권 0호 ,(2006)
3.조식의 학문 방법
학자로서의 조식에게 가장 큰 특징은 저술이 없다는 점이다. 전혀 글을 쓰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학설을 체계 있게 저술하여 남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유는 그의 학문 방법에서 찾아볼 수 있다. 조식은 유가의 철학적 해석이나 체계화는 이미 선배선현들에 의해 이루어졌으므로 후학으로서는 그들이 남긴 학문을 읽고 배워 마음에 새기고 몸에 익혀서 실천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다. 유가에는 학문에 앞서 정해진 도道, 즉 현세간을 경영해서 성현이 세운 인간의 이상을 실현하는 사업이 있으므로 모든 학설을 그 사업을 달성하는 데 모으면 족하지 더 이상 난해한 학설을 만들어 낼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조식이 행위실천을 강조했다고 해서 독서와 격물궁리格物窮理의 면을 소홀히 한 것은 아니다. 조식이 제자 오건에게 보낸 편지에서 밝혔듯이 평생 독서밖에 몰랐다고 할 정도로 그의 독서량은 많았고, 도교와 불교를 가리지 않고 폭넓게 섭렵하였다. 이는 행行을 강조하는 학자(학파)는 지知를 소홀히 한다는 많은 사람들의 선입견을 깬다. 조식은 자득自得과 고명高明은 꾸준히 학문을 하여 덕을 쌓아 가는 데에서 나온다고 강조함으로써 학문 과정을 깊이 중시하였다. 그는 학문은 단계를 밟아 높은 경지에까지 이르는 과정을 준수하여야 하고 만일 하학下學을 배제하고 바로 상달上達을 추구한다면, 그 학문이 아무리 넓고 크다 하더라도 막막하고 공허한 것이 되기 쉽다고 생각하였다. 이런 면에서 조식은 심학과 리학이 범할 수 있는(그리고 실제 병폐로 들어났던) 공허와 공소(공론)의 약점을 보완해서, 지知의 과정과 행行의 추동을 강하게 접목한 인물이라 볼 수 있다. 김충열, 남명 성리학의 특징 1: 자득과 실천, 남명학연구원, 『남명학연구원총서』 1권 0호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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