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의 봉안과 폭쇄

 1  {조선왕조실록}의 봉안과 폭쇄-1
 2  {조선왕조실록}의 봉안과 폭쇄-2
 3  {조선왕조실록}의 봉안과 폭쇄-3
 4  {조선왕조실록}의 봉안과 폭쇄-4
 5  {조선왕조실록}의 봉안과 폭쇄-5
 6  {조선왕조실록}의 봉안과 폭쇄-6
 7  {조선왕조실록}의 봉안과 폭쇄-7
 8  {조선왕조실록}의 봉안과 폭쇄-8
 9  {조선왕조실록}의 봉안과 폭쇄-9
 10  {조선왕조실록}의 봉안과 폭쇄-10
 11  {조선왕조실록}의 봉안과 폭쇄-11
 12  {조선왕조실록}의 봉안과 폭쇄-12
 13  {조선왕조실록}의 봉안과 폭쇄-13
※ 미리보기 이미지는 최대 20페이지까지만 지원합니다.
  • 분야
  • 등록일
  • 페이지/형식
  • 구매가격
  • 적립금
자료 다운로드  네이버 로그인
소개글
{조선왕조실록}의 봉안과 폭쇄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1. 머리말 1

2. 어람부록과 실록의 봉과 2

3. 실록의 춘추관 봉안 4

4. 실록의 외사고 봉안 5
1) 외사고의 설치 5
2) 외사고 봉안 과정 6

5. 폭쇄를 통한 실록의 관리 8
1) 실록폭쇄형지안의 작성 8
2) 문집에 나타난 폭쇄의 과정 9

6. 맺음말 11

본문내용
4. 실록의 외사고 봉안

1) 외사고의 설치

조선전기부터 실록은 서울에 있던 춘추관을 비롯하여 충주·전주·성주 등 지방의 중심지에 분산 보관하였다. 한 지역에 실록을 보관했다가 소실될 경우 영원히 전대의 실록을 복구할 수 없다는 인식에서였다. 특히 고려시대에 편찬된 것으로 여겨지는 {고려실록}이 외침의 과정에서 모두 없어진 경험도 크게 반영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방의 중심지는 화재와 약탈 등 실록이 소실될 수 있는 위험성이 항상 제기되었으며, 실제 중종대에는 비둘기를 잡다가 사고에 화재가 발생하여 실록이 소실되어 관련자가 처벌을 받기도 했다. 그리고 급기야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전주사고본을 제외한 모든 사고의 실록이 소실되면서 사고를 험준한 산지에 보관해야 한다는 의견이 대두되었다.
그런데 조선초기에 이미 양성지에 의해 外方 史庫는 산간지역에 설치해야 한다는 의견이 제시되었으며, 특히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춘추관, 충주, 성주의 3대 사고가 소실되고 전주사고본만 화를 면하게 되자 전란후인 광해군대에는 본격적으로 사고의 산간지역 설치가 논의되어 결국 강화의 마니산(이후 정족산으로 옮겨짐), 경북 봉화의 태백산, 강원 강릉의 오대산, 평안 영변 묘향산에 사고를 설치하고 이곳에 실록을 보관하였다. 묘향산사고는 후금의 침략 위협이 제기되어 다시 무주의 적상산으로 옮겨졌다.
하고 싶은 말
비싸다는 회원님의 건의가 있어 새해를 맞아 가격을 대폭 인하하였습니다. 많은 애용 바라며 그래도 비싸다싶으면 메일이나 평가란에 적어주세요.. ^^

적극 반영토록 하겠습니다..

행복한 한해 되세요 ^^
오늘 본 자료
더보기
  • 오늘 본 자료가 없습니다.
해당 정보 및 게시물의 저작권과 기타 법적 책임은 자료 등록자에게 있습니다. 위 정보 및 게시물 내용의 불법적 이용,무단 전재·배포는 금지되어 있습니다. 저작권침해, 명예훼손 등 분쟁요소 발견 시 고객센터에 신고해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