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 성리학의 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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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 성리학의 논쟁
1. 호남성리학의 전개 안진오, 호남 유학의 탐구, 이회문화사, 1996, pp.60-61.
조선 전기의 성리학이 거경궁리의 수양론을 통한 ‘제왕학’으로서의 성실성을 강조하고 본성의 발현에 따른 ‘현실적 통치학’으로서의 성격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었다면, 후기의 성리학은 성정 이기론(性情 理氣論)의 연구와 인물성의 같고 다름의 문제에 집착하는 이론 유학으로 발전하였다. 조선조 말기에 열강의 침략이 시작되고 군사적 사상적 외침에 직면하면서부터 ‘외세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철학적 대응책을 모색하였던 당시의 유학자들은 성리학적 이론으로서 현실적 대응의 철학을 제시한 면이 있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후기 성리학자들의 이론은 이론이 아닌 현실적 대응 논리와 자기보존을 위한 철학적 모색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조선조 근대 유학의 학문적 특징은 위정척사의 정신을 실천한 구국 의병운동과 순수한 성리학적 이론의 연구와 성리학적 이론에 근거한 실천운동을 그 특징으로 지적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이항로를 중심으로 한 기호계열의 학자들은 위정척사의 사상을 표방하고 의병활동에 적극 참여한 특징이 있다고 할 것이며, 전우 등의 간재학파와 이진상 등의 한주계열은 성리학의 연구와 학문적 진흥을 통하여 당시를 구제하고자 하였고, 기정진의 문인들은 노사의 유리사상과 성리학적 이론을 바탕으로 하여 이를 현실구제의 철학으로 삼아서 의병활동을 하였던 것이다. 이 가운데서 노사와 간재의 학문은 호남의 근대 성리학으로서 두드러진 특징을 나타내게 되었다. 이들 두 학파는 서로 성리학적 이론이 달랐기 때문에 많은 논쟁이 오고갔는데 실제로는 이러한 논쟁을 통하여 각기 자가의 이론을 발전시키고 근대 호남 유학의 특징을 형성하였던 것이며, 나아가 조선조 유학의 특징을 형성하게 되었던 것이다.
1.-(1) 참고 : 호남의 성리학 앞의 책, p.35.
조선의 성리학은 도학사상의 학문적 연구였다는 점에서 자연스런 발전현상이었다. 호남의 성리학이 조선조 성리학과 다른 특징을 나타내게 된 것은 구체적으로 기대승과 이황의 사칠논변(四七論辯)에서 기대승이 이기일원적 입장을 견지함으로써 이황의 이기이원적 주장과 견해를 달리한 데 기인하며, 기대승의 견해를 따르고자 하였던 기호의 선비들이 이황의 견해를 추종하는 영남의 선비들과 그 견해를 달리하였기 때문에 영남학과 기호학으로 학문적 특징을 구분하게 되었다.
성리학은 우주론, 인성론, 도덕론을 하나의 이론체계로 일관시켜 선의 발현이라는 인간 가치로 승화시키고자 하는 데 있다. 조선조에 있어서 이러한 이론적 발전은 삼봉이나 양촌 등의 성리학 연구가 그 선하를 이룬 것이었지만 조광조의 피화 이후, 호남에 있어서는 많은 성리학적 이론을 제기하는 학자들이 배출되었다. 기묘명현으로서는 최산두 양팽손 등이 배출되었고 그 후 박순 기대승 등 성리학 연구에 공적을 남긴 학자가 많다.
2. 간재와 노사에 대하여
① 간재 전우
본관 담양. 호 간재. 자 자명.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고 임헌회 문하에서 20년간 학문을 닦아 윤치중·서정순과 함께 그의 제자가 되었다. 노론파 학자들의 학통을 이어, 이이와 송시열의 사상을 신봉하고 특히 이이의 학설을 옹호하였으나 주리·주기의 양설을 모두 배척, 절충적 이론을 세웠다. 1882년(고종19) 유일로 천거되어 선공감감역이 되고 그 후 강원도 도사·장령·순흥부사 ·중추원참의 등에 보직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만년에는 전라도의 계화도에서 후학을 가르쳤다. 저서에 《간재집》이 있다.
간재의 학문·사상은 율곡 이이로부터 김장생, 김집, 송시열, 권상하, 김창협, 이재, 김원행, 박윤원, 홍직필 등으로 이어지는 학맥 속에서 형성되었다. 간재는 이기설을 비롯하여 성리설의 여러 방면에서 율곡의 학설을 고수하는 경향을 보였다. 그러나 그들의 성리설이 갖는 사회 문화적 함의는 16세기의 율곡 학설이 가지고 있던 것과 반드시 같은 것은 아니었다.
그들이 살았던 19세기 중기 전후는 조선 사회가 내외적으로 혼란에 휩싸이고, 지식인들은 이에 심각한 위기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퇴계의 학맥에 이은 한주 이진상은 물론이고, 율곡 학맥에 닿아 있던 화서 이항로와 노사 기정진 등은 퇴계처럼 이(理)의 능동성을 강조하는 쪽으로 기울어가고 있었다. 이것은 이(理)를 통해서, 또는 이(理)가 직접 당시의 절망적 현실을 바로 잡아줄 것이라는 기대감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었다. 간재는 동시대의 한주·화서·노사의 학설을 적극적으로 비판하면서 자신들의 학설을 확립하였다. 그들은 저들처럼 이(理)의 운동성, 즉 능동적 자기 실현성을 인정하는 것은 곧 주자와 율곡의 학설에 위배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들은 주자와 율곡의 학설을 옹호하고, 도학 자체에 집착하는 면모를 보였다. 이 점은 19세기 말엽 이후 제국주의 침탈의 엄혹한 현실 속에서 간재가 선택한 행로로 잘 표현된다. 간재는 평생 동안 도학적 전통을 고수하였다. 그는 여러 차례 관직에 임명되었지만 한 번도 나아가지 않았고, 동학농민전쟁으로 소란스러울 때도 ˚동학에도 관심 없고 서학에도 관심 없으며, 사는 것도 묻지 않고 죽는 것도 묻지 않으며, 오직 의(義)만 따르겠다.˚고 버텼다. 또한 그는 최익현이 의병에 동참할 것을 종용할 때도, 곽종석이 일본의 침략을 성토하는 ‘파리 장서’에 서명을 요청할 때도 거절하였다. 그는 1908년 9월, 나라가 기울자 자신의 도를 보전하기 위해서 서해의 작은 섬 왕등도로 떠났다. 그리고 인근 섬을 전전하다가 끝내 육지를 밟지 않고 세상을 떠났다. 그에게서 도는 우주의 보편적인 이법(理法)이자 인간 행위의 영원한 준칙이다. 다른 유학자와는 달랐던 그의 특별한 행로는 이법(理法) 이자 준칙인 도(道) 관념으로부터 도출된 것이었다. 따라서 간재는 유교적 질서에 의해 구축된 현실 세계의 원리는 변할 수 없는 것이며, 현실 세계의 혼란은 일시적인 것으로 파악하고, 이법(理法)을 지키기 위해 학자로서 자처하면서 죽음이 아닌 은둔자의 길을 선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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