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개론 목회서신 - 데살로니가 전·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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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개론 목회서신 - 데살로니가 전·후서 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데살로니가 전·후서
데살로니가 전·후서를 볼 때, 마게도냐 그리스도인들이 바울 사도의 마음에 특히 가까웠던 것이 분명하다. 바울은 그 지역에 복음을 전하는 데 큰 성공을 거둔 것이 분명하며, 그곳의 개종자들은 바울의 교훈에 충실하였고, 그 결과 바울은 그들에게서 큰 힘을 얻고 그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기를 열망했다. 바울이 고린도에서 받은 대접과 갈라디아에서 그의 복음에 의문을 제기하던 것을 고려하면 바울이 마게도냐의 교회에서 위안을 찾은 것은 별로 놀랄 일이 아니다.
데살로니가 “전서”와 “후서”의 순서에 대한 전통적인 입장은 두 문서를 확실히 구별하기 위해 편의상 채택한 것으로서, 본문 자체에 나타나는 어떤 단서를 근거로 한 것이 아니다. 보통은 이러한 순서가 편지의 길이로 근거로 해서 정해진 것이라고 생각한다. 곧, 데살로니가전서가 더 길기 때문에, 먼저 기록된 것으로 생각되고, 따라서 정경의 순서에 있어서도 앞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몇몇 학자들은 이 순서가 뒤바뀌어야 옳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전통적인 순서가 갖는 문제의 핵심은 곧, 바울이 첫 번째 편지를 보내 후 그렇게 짧은 기간 내에 두 번째 편지를 - 더구나 첫 번째 편지의 내용과 별다른 특별한 내용이 없는 편지 - 써 보냈다는 사실에 대해 모든 사람이 다 납득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만일 바울의 가르침에 대해 전반적인 오해가 있게 되었다는 정황을 인정할 수 있다면 두 번째 편지를 곧바로 써 보낸 사실이 납득이 될 것이다. 랄프 P. 마틴, 원광연 옮김, 「신약의 초석 Ⅱ」,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2004), P 252.
Ⅰ. 데살로니가 전서
데살로니가전서에는 나머지 주요 바울서신에 많이 사용되는 ‘육’, ‘죄’, ‘죽음’, ‘몸’, ‘자유’, ‘생명’ 등등의 인간학적 용어가 나오지 않으며 ‘율법’, ‘칭의론’, ‘십자가 신학’, ‘세례’, ‘성만찬’, ‘교회’등등의 신학적·교리적 주제와 관련된 논의도 없다. 그리고 구약성서 인용이나 유대교와의 논쟁도 찾아볼 수 없다. 그래서 과거 몇십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데살로니가전서는 바울 신학을 연구하는데 별로 중요하지 않은 문서로 소홀히 다루어져 왔다. 그렇지만 신약성서 문서 가운데 최고(最古), 최초(最初)의 문서인데 데살로니가전서에는 초대 그리스도교와 초기 바울의 종말 사상이 어떠했으며, 이방 사람에게 전한 전도 설교의 내용이 어떠했는지에 대한 귀중한 자료가 내포되어 있다. 김창락 외 지음, 「신약성서개론」, (기독교서회, 2002), p 314.
1. 형 성 배 경
1)외부적 상황 김연태, 「데살로니가 전서-묵시적 열광주의에 대한 응답」, (서울신학대학교출판부: 신학과 선교 1993, 18집).
- 지리적 상황 데살로니가는 기원전 4세기 말경에 마게도냐 왕 카산더(Kassander)가 재건한 도시인데, 그이 아내이며 알렉산더(Alexander) 대왕의 이복누
이인 데살로니케의 이름을 따서 붙인 것이다. 김창락 외 지음, 「신약성서개론」, (기독교서회, 2002), p 309.
지리적으로 에게해에서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따라서 그곳은 항상 전쟁이 있을 때마다 중요한 해군기지로 사용되곤 하였다. 육로로는 로마와 동방제국을 연결하는 엑나티아 가도(Via Egnatia) 선상에 있었는데 이 길은 비잔티움으로부터 아드리아해의 서쪽 직선 방향에 위치한 다라치움(Dyrrhachium, 현재의 알바니아)까지 멀리 뻗쳐 있고 로마에까지 연결되어졌다. 바울과 그 동행한 선교사들을 이 도로를 따라 빌립보에서 암비볼리를 경유하여, 아볼로니아를 거쳐서 데살로니가로 갔을 것이다. 빌립보로부터 데살로니가까지의 실제 여행거리는 약160km 정도 되고 데살로니가에서 아덴까지는 약 350km 정도 된다.
정치적인 상황 마게도냐가 주전 168년 로마의 영토가 되었을 때 그곳이 처음에는 네 행정구역으로 나뉘었고, 데살로니가가 그 둘째 지방의 수도가 되었으나 주전 148년 전체가 통합되면서 데살로니가는 마케도냐의 수도가 되었다. 영웅 시이저(Caesar)가 암살되고 로마가 내란상태에 빠졌을 때 데살로니가는 시이저의 양자 옥타비우스 편에 가담한 공으로 주전 42년에 자유도시가 되었다. 자유도시가 됨으로서 지방 자치를 하게 되고, 군대를 소유하고, 세금에 유리한 위치를 점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데살로니가는 주후 27년도에 재편된 마케도니아 지방총독의 거주지로 남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