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석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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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론

평안북도 정주에서 출생. 본명은 기행(夔行). 오산 중학과 일본 도쿄 아오야마(靑山)학원에서 영문학을 공부하고, 1934년 귀국후 조선일보사에서 잡지 의 편집을 하였다. 시인으로 등단하기 전에 먼저 , 등의 소설을 발표하였고, 1935년 시 을 발표하여 등단하였다. 이후 시집 을 간행하였다. 함경남도 함흥 영생고보 교사를 거쳐 만주에서 측량보조원, 측량서기, 세관업무 등에 종사하다가 광복 후엔 북한에서 아동문학을 포함한 문필 활동을 계속한 것으로 알려졌다.
백석의 시세계는 토속적인 공간을 후각과 미각을 표나게 내세운 감각으로 방언을 활용해 능수능란하게 표현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방언을 즐겨 쓰면서도 모더니즘을 발전적으로 수용한 시들을 발표하였다. , , , 등 대표작은 토속적이고 향토색 짙은 서정시인데, 백석은 지방적, 민속적인 것에 집중하여 독창적인 경지를 개척하는데 성공한 시인이다. 백석은 파괴되기 전의 농촌의 공동체적 정서를 풍부한 평안도 방언으로 표현해 내는 등 모국어의 고수, 민속화의 정경 확보라는 면에서 문화적 저항을 실천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의 이러한 주체적인 민족자아의 옹호정신과 시적 기교들은 그와 유사한 정신사적 맥락을 따르고 있던 문예지 의 젊은 시인들을 비롯한 많은 시인에게 영향을 미쳤다.
백석의 문학 활동은 그의 삶과 긴밀한 관련이 있다. 한 시인의 삶과 정신을 보여 주는 일차 자료는 바로 그가 남긴 시작품이다. 시작품 속에 그의 삶의 단면과 정신의 흐름이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이다.
Ⅰ. 고향에의 절망 : 소월과 백석
1912년 정주 태생인 백석이 문단에 나선 첫 작품이 「정주성」(1935)이었던 것은 그의 본바탕을 말해 주는 것이다. 그가 조선일보 기자 또는 그와 관련된 『여성』지의 기자 노릇을 한 것은 이것과 관련이 있다.1933년 7월, 조선일보의 조만식 사장 다음을 이은 방씨는 정주 출신이었고, 부사장 자격의 이광수 역시 정주 출신이었다. 정주 출신, 이것은 백석은 백석론의 중요한 열쇠이다. 백석이 「정주성」으로 문단에 나왔다는 것, 그로 말미암아 조선일보의 비호를 받았다는 것, 그 장학금으로 유학에 나아갈 수 있었다는 사실로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은 평양의 김동인이 또 한 사람의 정주 부근 출신의 천재 시인 김소월을 소중히 보살폈던 일과 그 맥락을 같이하는 것이라 보면 된다.
고향으로부터의 도피
소월이 정주 근처를 벗어나 삼수갑산으로 도피한 것과 같이 백석은 소월보다 훨씬 철저하게 정주성을 탈출하기 시작한다. 소월의 도피란 그를 낳고 기른 정주성, 그 지방성이 소월의 숨통을 누르고 있었던 탓이다. 즉, 정주 출신의 , 관북방언 사용자인 김소월, 백석 두 천재
고향을 증오할 수 있는 자만이 진짜 고향의 본질을 아는 자만이 진짜 고향의 본질을 아는 자
→ 고향에 절망한 자만이 진짜 고향의 참뜻을 아는 것이다.
시인의 천재성을 가능케한, 혹은 증명케 한 것이 고향 탈출성에 있다.
김소월, 백석은 고향에 절망할 만큼 뛰어난 정신력의 소유자이다. 고향에 절망함이란, 먼 것에의 그리움이다. 즉, 고향을 철저히 사랑한 자만이 철저히 고향을 저주할 수 있고, 이러한 아이러니의 실천을 할 수 있는 인품을 천재라 부른다.
소월 vs 백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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