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비 박사 석주명을 읽고

 1  나비 박사 석주명을 읽고 -1
 2  나비 박사 석주명을 읽고 -2
 3  나비 박사 석주명을 읽고 -3
※ 미리보기 이미지는 최대 20페이지까지만 지원합니다.
  • 분야
  • 등록일
  • 페이지/형식
  • 구매가격
  • 적립금
자료 다운로드  네이버 로그인
소개글
나비 박사 석주명을 읽고 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나비 박사 석주명을 읽고…
석주명은 고등학교 시절 문제아였다. 그래서 처음에 다니던 숭실고교를 중퇴하고 개성의 송도고교로 전학을 가기도 했다. 그러나 거기에서도 마찬가지로 휴일에는 개성 근처의 명승지로 놀러 다니고 학교가 끝나면 친구들과 어울리느라 공부는 뒷전이었다. 특히 그는 기타를 치는 것을 좋아했다. 그러나 2학년 겨울방학 그에게 날아온 성적표는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항상 놀기만 했기에 석주명은 반에게 꼴등이었고, 낙제표시가 된 과목도 많았다. 그것을 계기로 그는 스스로를 반성하기 시작했고, 딴사람으로 변했다. 그 때부터 그는 정말 한마디로 미친 듯이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 후, 그는 일본의 명문 가고시마 농림학교에 합격한 유일한 한국학생이 되었다.
처음에는 석주명은 정말 여느 학생들처럼 노는 것을 좋아하고 공부하기 싫어하는 학생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바뀌는 모습을 보니, 정말 그가 대단하다고 여겨졌으며 그의 끈기를 본받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석주명은 한번 마음먹은 것은 기어코 실천해야 직성이 풀렸다고 하는데, 고등학교 시절 기타에 미친 것도 이러한 성품 때문이었다고 한다. 나도 스스로는 끈기가 있다고 생각했지만, 지금까지 어떠한 일을 중도에 포기한 경우가 몇 번 있었다. -석주명은 기타리스트의 꿈을 가지고 있다가 세계적인 기타리스트 세고비아의 연주를 듣고 포기했다고는 하지만 - 단기지계라는 말이 있듯이 앞으로는 어떤 일이든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해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대학교 시절의 유명한 일화 중 하나이다. 아침부터 장대비가 쏟아지는 날, 숙소에 모여 앉은 학생들은 예정된 곤충채집은 엄두도 못 내고 교수의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그런데 오카지마 교수는 학생들을 불러 모아 “지금부터 밖에 나가 곤충을 채집해 오는 학생에게 상을 주겠다.”고 말했다. 이 빗속에 곤충이 있을 리 만무했지만 지도 교수의 말씀인지라 모두 채집도구를 갖추고 하나 둘 숙소를 나섰다. 그리고 한나절이 지나서 모두들 빈손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조금 뒤 조그만 체구의 조선인 학생이 배낭에서 삼각지 백 여장을 조심스럽게 꺼내 교수 앞에 내놓았다. 각각의 삼각지 속에는 하루살이 한 마리씩이 소중히 싸여져 있었다.
그는 이 일로 인해 지도교수이자 일본 곤충학회 회장을 지냈던 오카지마의 주목을 받으며 곤충 연구에 관심이 더욱 깊어지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부분을 읽으며 ‘과연 나라면 저 상황에서 어떻게 했을까?’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아마 다른 학생들처럼 빈손으로 돌아왔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인지 석주명박사가 더욱더 존경스럽게 느껴졌다. 또한 장대비가 오는 악조건 속에서도 ‘곤충 채집을 꼭 해가겠다.’라는 사명감과 열정이 너무나도 훌륭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대학교를 졸업하고 송도고교의 교사로 부임하면서 나비연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석주명은 송도고보의 학생들에게 방학만 되면 나비를 2백 마리씩 채집해오라는 숙제를 냈다. 괴짜 선생님 덕분에 학생들은 방학마다 포충망을 들고뛰는 연구보조원이 되었었다. 그와 학생들이 발로 뛴 덕분에 시간이 지날수록 송도고보의 박물관은 온갖 종류의 나비표본으로 가득 찼고 개성의 명소가 됐다. 그리고 석주명은 사람들 사이에 송도(개성)의 기인, 나비 박사로 알려지게 됐다.
석주명은 교사가 되어 자신의 학생들과 나비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다는 점에서 그는 그가 하고 싶은 일을 찾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한다는 점. 일제강점기 시절, 일제의 탄압이라는 힘든 현실에도 불구하고 하고 싶은, 할 수 있는 일을 했다는 점이 정말 멋있었다.
또한 석주명은 ‘집념의 추적자’라는 별명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나비에 대한 석주명의 열의는 집념 그 자체였는데, 어떠한 상황에서도 중요한 나비가 발견되면 몇 시간이 걸려서라도 쫓아가 잡고 말았다. 한번은 지리산에 채집여행을 갔다가 팔랑나비과의 나비 한 마리를 발견했다. 한눈에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발견된 적이 없는 나비임을 알아챈 그는 나비를 뒤쫓기 시작했다. 길이가 4cm 정도밖에 안 되는 그 작은 나비는 석주명에게 약이라도 올리듯이 나뭇가지에 앉았다가 날아가기를 반복하며 도망갔다. 나비만을 보면서 쫓아가는 바람에 수도 없이 넘어져 온몸이 피투성이가 됐지만 그는 끈기 있게 나비를 쫓았다. 3시간이 넘는 추격전으로 기진맥진해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을 정도가 될 무렵 석주명의 끈기에 지친 나비가 드디어 포충망 안으로 들어왔다. 말 그대로 피땀을 흘려서 잡은 나비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발견된 종임을 확인하는 순간 상처의 아픔은 씻은 듯이 사라졌다. 나중에 이 종은 지리산 팔랑나비라는 우리 이름을 갖게 되었고 지리산이 서식의 북방한계선으로 고쳐지게 됐다. 그리고 한국산 나비에 대해서는 석주명이 독보적인 권위를 확보하게 되자 영국에 본부를 둔 왕립 아시아학회의 한국지회는 그에게 한국산 나비에 관한 총목록을 작성해 출판할 것을 의뢰했다. A Synonimic List of Butterflies of Korea (조선산 접류 총목록) 이 이때 정리된 책으로 한국산 나비 연구의 결정판이요, 각국의 학자에게 필수적인 참고도서가 됐다. 4백 쪽이 넘는 분량에 영어로 된 이 책은 한국인의 저서로는 처음으로 영국왕립도서관에 소장됐으며 이로써 석주명은 세계적인 학자의 반열에 올라섰다.
이 부분에서는 그의 열정에 감탄하고, 또 경의를 표 할 수 밖에 없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려 3시간이라는 긴 시간동안 4cm도 안 되는 작은 나비를 추적했다는 것이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되었고, 결국에는 ‘지리산 팔랑나비’라는 이름을 붙여 자신이 헛되지 않았음을 보여준 점에서 너무나도 존경스러웠다. 또한, 그의 저서인 ‘조선산 접류 총목록’은 한국인의 저서 중 최초로 영국왕립도서관에 소장되었는데, 이 것 역시 대단하다고 느껴졌다. 그리고 각국의 학자들에게 필독서가 될 만큼 엄청난 파급효과가 있었다고 하니, 존경스러울 따름이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는 1950년 한국전쟁에 의해 허무한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는 죽기 직전, “나는 나비밖에 모르는 사람이야!”라는 최후의 한마디를 남기고 죽었다고 한다. 그리고 석주명이 죽은 후 그의 죽음을 애석히 여긴 일본인 학자 시로즈(白水隆)는 그를 기려 흑백알락나비 아종의 학명을 Hestina japonica seoki로 지었고, 시바타니(柴谷篤弘)는 네발나비과에 Seokia라는 새로운 속(屬)을 설정해 홍줄나비의 학명을 Seokia pratti로 명명해 주었다. 석주명을 기리는 뜻에서 석(seoki, seokia)자를 붙인 것이다.
그는 정말 허무한 죽음을 맞이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나도. 나비계에서 훨씬 더 큰, 더 많은 학술적 결과를 알아낼 수 있었는데, 인민군의 총에 맞아 42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는 자체가 정말 아쉬웠다. 그러나 그가 죽은 뒤에 일본에서 두 학자가 석주명을 기리는 뜻에서 학명에 석(Seoki)를 넣어주었다는 것을 보며, ‘정말 석주명은 대단한 사람이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을 읽으며 나도 석주명박사는 닮고 싶고, 석주명 같은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석주명박사처럼 어떠한 일을 하던지 그 분야에 미쳐서 정말 그 끝을 볼 만큼 열심히 그리고 열정적으로 모든 일을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오늘 본 자료
더보기
  • 오늘 본 자료가 없습니다.
해당 정보 및 게시물의 저작권과 기타 법적 책임은 자료 등록자에게 있습니다. 위 정보 및 게시물 내용의 불법적 이용,무단 전재·배포는 금지되어 있습니다. 저작권침해, 명예훼손 등 분쟁요소 발견 시 고객센터에 신고해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