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후감 - 백범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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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감 - 백범일지 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백범일지
김구 선생님의 가족은 안동 김씨 경순왕의 자손이다. 그들은 방계 조상 한 분이 역적으로 몰려 집안이 망하게 되자 11대 할아버지께서 가족을 끌고 서울에 도망하여 고향으로 피신하였다. 하지만 안전하지 못해 80리 떨어진 백운방의 텃골에 숨을 자리를 구하였다. 그들은 상민으로 살아갔다.
김구 선생님은 1876년 7월 11일 백부가 사시는 곳에서 1주일 동안 어머니가 진통에 힘들어하며 겨우 태어났다. 네 살 때 천연두가 생겨 어머니가 죽침으로 고름을 빼다가 그의 얼굴에 마마 자국이 생겼다. 다섯 살 때 그는 장난꾸러기였다. 강령 삼가리라는 곳으로 이사를 갔다. 그가 일곱 살 때 가족들이 일가들을 쫓아 고향으로 돌아갔다. 아버지는 이웃 양반들은 때려주고 인근 양반들이 아버지를 달래기 위해 도존위 자리에 앉혔다. 하지만 공금을 썼다는 누명으로 그 자리에서 나갔다. 그는 어느 날 어른들에 의해서 과거에 급제하면 양반이 된다라는 것을 깨닭고 아버지께 서당에 보내달라고 하여 선생님을 모셔왔다. 돈이 부족하여 어머니와 아버지께서 모두 다 팔고 나와 함께 안악, 신천, 장련 등 함께 돌아다니다가 김구 선생님을 장련의 육촌 누이 댁에 맡겼다. 나중에 부모님이 다시 오자 고향으로 다시 돌아가 돈을 빌리고 그는 서당에 다니게 되었다. 그가 열네 살이 되자 이름 높은 선비 한 분을 모셔 무료 수강생으로 통학하였다. 이때 해주에 마지막 과거시험을 본다고 하여 그는 과거 날 선생님과 함께 과거장에 갔지만 엉망진창이라 그는 크게 실망하였다. 그때 포동이라는 동네에 오응선이라는 사람이 동학에 들었다. 그는 열여덟 살 될 때 깨끗이 하고 포동 오씨 댁을 찾아 갔다. 그는 동학에 대해 물어봤다. 그리고 동학에 입도할 마음이 생겨 아버지에게 물어보자 아버지도 하신 다며 동의하였다. 그리곤 몇 달 후 수천 명의 신도들이 모였다. 그리고 ‘아기 접주’ 라는 별명을 얻었다. 또 대도주를 찾아갈 인망 높은 책임자 열다섯 중 한 명으로 뽑혔다. 9월경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 총기를 갖고 있는 신도들을 모두 모아 훈련을 하였다. 어느 날 안 진사가 사람을 보내왔다. 안 진사의 이름 태훈, 그의 맏아들 중근은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안중근이다. 그의 나이 19살이 될 때 홍역으로 앓고 있을 때 이동엽이 전군을 보내 부하 장수를 총살하였다. 그리고 그는 아는 사람네 집으로 피신하였다. 그는 석 달을 숨은 뒤 청계동 마을로 가서 안 진사를 만나고 안 진사는 부모님과 함께 청계동에서 살림살이를 하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는 부모님과 함께 청계동에서 살기 시작하였다. 그때 나이 20, 어느 날 고능선이라는 학자가 안 진사의 사랑에 방문하였다. 고능선 선생님은 김구 선생님에게 자기 사랑에 오라고 하고 고능선 선생님은 사랑에서 김구 선생님을 가르쳤다. 그리고 고능선 선생님께서 청나라에 가서 사정을 알아보고 그 나라 인물과 사귀어 두는 것이 뒷날 유익하다면서 김구 선생님은 수락하셨다. 그리고 김구 선생님은 신천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과 고 선생님의 손녀가 약혼이 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10년 전 아버지가 김씨와 술을 마시다가 그에게 8~9세의 딸이 있었다. 김구 선생님은 텃골로 다시 이사했다. 김구 선생님은 안악군 치하포로 건너가려고 배를 탔다. 빙산에 둘러 싸였어도 그는 작은 빙산을 치워냈다. 그리고 왜놈이 있다는 것을 눈치채자 그는 왜놈을 죽였고 다시 집으로 갔다. 석 달 후 그는 체포되어 해주 감옥에 들어갔다. 또 두 달 뒤 그는 인천 감옥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그는 이제 경무청으로 들어갔다. 그는 일본의 씨도 없이 죽인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는 감리사에 의해 신문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또 소리를 지르고 감리사는 아무 말도 없었다. 그는 어느 날 처형을 받아야 했다. 하지만 임금은 사형을 중지하라고 하였다. 김주경이라는 큰 인물은 자기 재산을 다 쓰고 석방운동을 7~8개월 동안 하였다. 그는 땅을 파고 죄수들과 함께 나갔다. 들어 온지 2년 만에 나온 것이다. 그는 서울로 가서 1년 동안 감옥에서 함께한 사람들을 만나고 남원으로 가서 김창수를 만나 김창수의 집에서 잤다. 그리고 그는 계룡산 갑상에 도착했다. 그는 공주 사는 이씨를 만나 마곡사 산 위에 있는 절에 가서 머리를 깎고 중이 되고 이름을 원종이라고 하자 스님은 생긴 것이 미련해 중은 안되겠다고 한다. 스님과 상의해서 서울에 가서 혜정이라는 사람을 만나 해주로 가서 혜정에게 부탁했다. 집에 가서 부모와 몰래 만나 안부를 전해달라고 하였고 위치는 말하지 말라고 하였다. 그러더니 4월 29일 혜정은 부모님을 모시고 와서 나와 평양으로 혜정도 함께 갔다. 부모님은 3월 9일 해주로 돌아갔는데 순검한테 잡혀 감옥에 형벌을 받고 어머니는 곧 석방하셨지만 아버지는 석 달 후에 석방하셨다고 했다. 그는 강원도에 몰래 향했다. 그리고 그는 김주경의 셋째 아우 김진경이 맞아 줬다. 그는 김진경에게 사랑에 머물면서 아들에게 글자나 가르치며 소식을 기다리면 안 되겠냐고 물었는데 김진경은 허락 하였다. 그는 30여 명의 아이들을 데리고 가르쳤다. 다음날 이춘백의 말을 다 듣고 서울로 올라가 유완무를 만나러 갔다. 그리고 유씨는 봉투에 담은 편지와 노자를 주면서 충청도 연산 도림리 이천경을 찾으러 갔다. 이천경은 다시 편지를 줘서 무주 읍내에 이시발을 찾아가라고 하였다. 또 편지를 주어 지례군 천곡이라는 마을 성태영에게로 보냈다. 그는 다시 유완무 집으로 갔다. 그리고 나흘 만에 해주에 고 선생을 만났다. 1902년 그는 약혼자를 구하려고 하였다. 어느 날 처녀가 와서 1년 동안 공부 할 수 있다고 하여 그는 그녀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1903년 약혼녀네 집 낭자의 병세가 위중하고 약과 의사를 구하기 힘들어 2~3일 후에 돌아갔다. 그는 약혼에 실패하였다. 그리고 안창호의 누이인 안신호와 결혼을 권했다. 1905년 학자들이 의병을 일으켰다. 김구 선생님은 진남포 청년회의 총무직을 맡아, 청년회 대표로 서울에 파견되었다. 청년회 대표가 모여 교회사업을 한다고 했지만 속으로는 애국운동이었다. 상소문은 이준이 짓고 첫 번째 대표자는 최재학이며 그밖에 네 명을 더하여 다섯 명이 국민의 대표이다. 모두 대한문 앞으로 나갔다. 갑자기 왜놈들이 와서 싸움이 벌어졌다. 김구 선생님은 황해도로 돌아와 교육에 종사하였다. 그리고 양산학교 교사가 되어 근무하게 되었다. 왜병들이 집집마다 닭과 달걀을 강탈하였다. 안악군에는 십 수 명의 인재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교육발전에 힘썼다. 예수교회에는 안신학교가 설립되고 사립양산학교가 설립되고 그리고 공립 보통학교가 설립되었다. 김구 선생님은 최광옥 등과 합력해서 해서교육총회를 조직하고 학무총감의 직무를 맡았다. 경찰서에서 이토 히로부미가 한국사람 청계동의 소년 안중근의 총을 맞고 죽었다는 보도를 보았다. 안중근은 체포되었으나 한 달 만에 풀려났다. 양산학교 소학부와 재령 보강학교 교장 겸임하였다. 1910년 11월 경성 양기탁의 집에서 신민회 회의하였다. 양기탁, 이동녕, 안태국, 이승훈, 주진수, 김도희 등과 함께 서울의 도독부 설치 하였다. 12월 안명근이 양산학교로 백범을 찾아왔다. 1911년 1월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어 김홍량, 도인권 등과 함께 경성으로 압송하여 고문을 당하였다. 7월 지방재판소에서 징역 15년 판결되고, 서대문감옥으로 갔다. 1912년 9월 명치 일왕이 죽어 15년 형이 7년으로 되었다. 그리고 명치의 처가 죽어 5년 형으로 되었다. 또 이름을 백범으로 고쳤다. 1914년 인천감옥으로 가서 인천항 축항공사에서 강제노역을 하였다. 1915년 둘째딸 화경 죽었다. 8월 가출옥을 하게 되었다. 1916년 문화 궁궁농장을 검사하였다. 그리고 셋째 딸 은경이 태어났다. 1917년 1월 준영 숙부 돌아가셨다. 2월 동산평 농장의 농감이 되어 학교를 세움. 그리고 셋째 딸 은경이 죽었다. 1918년 11월 아들이 출생하였다. 1919년 3월 29일 안악에서 출발하고 평양, 신의주, 안동을 거쳐 상해로 실패하였다. 9월 상해 임시정부의 경무국장이 됐다. 1920년 8월 아내와 아들을 데리고 상해로 갔다. 1922년 어머니도 상해로 갔다. 9월 임시정부 내무총장이 되었다. 10월 여운형, 이유필 등과 한국노병회를 조직하고 이사장이 되었다. 1923년 6월 임시정부 내무총장 자격으로 국민 대표회의 해산령을 내렸다. 1924년 1월 아내 최준례가 상해 홍구 폐병원에서 사망하였다. 6월 내무총장으로 노동국총판을 겸임하였다. 1925년 나석주 의사가 옷을 저당 잡혀 생일상을 차려줘 가장 영광스러운 생일을 보냈다. 1926년 12월 국무령에 선출됐다. 1927년 3월 임시정부, 3차개헌을 통해 국무령제를 집단지도체제인 국무위원제로 개편하였다. 국무위원에 선출됐다. 8월 임시정부 내무장이 되었다. 1928년 3월 백범일지 상권 집필 시작하였다. 독립운동의 침체를 타개하기 위해 미주교포들에게 편지를 보내 자금지원 요청하였다. 1929년 5월 1년 2개월 만에 백범일지 상권 원고 쓰기 마침. 8월 상해 교민단 단장에 선출. 1930년 11월 임시정부 재무장이 되었다. 1931년 일본요인 암살을 목적으로 한인애국단을 만들었다. 1932년 1월 8일 이봉창 의사 동경에서 일왕 히로히토 저격하였다. 4월 29일 윤봉길 의사 상해 홍구공원에서 일왕 생일 경축식장에 폭탄을 던져 시라카와 대장 등을 죽였다. 5월 한인애국단원 암살을 위해 국내에 파견했으나 체포되었다. 6월 임시정부에서 사임하였다. 1933년 5월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 낙양분교에 한인특별반 설치하였다. 1934년 12월 남경에서 중앙군관학교 한인 학생을 중심으로 한국 특무대독립군 조직했다. 1935 10월 임정의정원, 가흥 남호에서 선상 비상회의. 그리고 이동녕, 김구, 조완구 등을 국무위원으로 보선됨. 11월 임시정부를 보호하기 위하여 한국국민당을 조직하였다. 1937년 8월 한국국민당, 한국독립당, 조선 혁명당, 한인애국단 및 미주 5개 단체를 통합하여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 결성하였다. 중일전쟁으로 임정 대가족과 남경장사로 옮김. 1938 5월 장사 남목청에서 3당 합당문제 논의 중 이운환의 저격으로 부상당함. 10월 임시정부 유주로 옮김. 1939 4월 어머니 곽낙원, 중경에서 인후염으로 돌아가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