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장각에 대한 이해와 규장각이 출판문화에 있어 갖는 다양한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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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규장각에 대한 이해와 규장각이 출판문화에 있어 갖는 다양한 의미-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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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  규장각에 대한 이해와 규장각이 출판문화에 있어 갖는 다양한 의미-14
 15  규장각에 대한 이해와 규장각이 출판문화에 있어 갖는 다양한 의미-15
 16  규장각에 대한 이해와 규장각이 출판문화에 있어 갖는 다양한 의미-16
 17  규장각에 대한 이해와 규장각이 출판문화에 있어 갖는 다양한 의미-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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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  규장각에 대한 이해와 규장각이 출판문화에 있어 갖는 다양한 의미-19
 20  규장각에 대한 이해와 규장각이 출판문화에 있어 갖는 다양한 의미-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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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규장각에 대한 이해와 규장각이 출판문화에 있어 갖는 다양한 의미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들어가는 말

1. 정조의 생애
1.1 정조의 출생
1.2 정조 즉위 전 시대적 상황
1.3 인간정조 (효심)
1.4 정조의 죽음

2. 정조의 업적
2.1 개혁정치
2.1.1 탕평책
2.1.2 장용영
2.1.3 화성축조
2.1.4 인사정책
2.1.5 규장각

3. 정조와 규장각
3.1 규장각의 효시
3.2 규장각의 성격
3.3 규장각의 관리조직도
3.3.1 초기 인적구성
3.3.2 각신과 검서
3.3.3 초계문신(抄啓文臣)
3.3.4 규장각 각신의 권한

4. 규장각과 출판문화
4.1 규장각 소장자료
4.1.1 소장자료의 종류 및 가치
4.2 대표적 출판문화
4.2.1 규장각 출판물(정치, 사회, 제도 분야)
4.2.2 규장각 소장 활자

5. 규장각이 출판문화에 있어 갖는 의미

6. 정조 사후의 규장각

7. 오늘날의 규장각과 그 교훈

나오는 말
본문내용
1.1 정조의 출생
이름 산(). 자 형운(亨運). 호 홍재(弘齋). 영조의 손자로 아버지는 장헌세자(莊獻世子:思悼世子), 어머니는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의 딸 혜경궁홍씨(惠慶宮洪氏:惠嬪)이다. 1759년(영조 35) 세손에 책봉되고, 1762년 2월에 좌참찬 김시묵(金時默)의 딸 효의왕후(孝懿王后)를 맞아 가례를 치렀다. 이 해 5월에 아버지가 뒤주 속에 갇혀 죽는 비운을 맛본 뒤 줄곧 정치적 위협 속에서 목숨을 부지해야 했다. 노론 벽파들이 세자 주위에 내시와 종을 배치해 밤낮으로 엿보고 이리저리 음탐해, 정조는 몇 달씩 옷을 벗지 못하고 잠을 청하거나 새벽닭이 울 때까지 책을 잃었다고 한다. 1764년 2월 영조가 일찍 죽은 맏아들 효장(孝章)세자의 뒤를 이어 종통을 잇게 하였다.
1.2 정조 즉위 전 시대적 상황
정조가 즉위 할 때의 정국의 불안한 상황은 표면상이라도 균형을 유지했던 붕당이 무너진 숙종 때부터 이미 시작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숙종 → 경종 → 영조 → (사도세자) → 정조
숙종은 자신의 두 여자를 매개로 남인과 서인을 번갈아 기용하며 왕권을 강화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두 세력: 남인을 대표하는 장희빈, 서인을 대표하는 인현황후)
☞ ↑ 위 내용 관련 자료「살아있는 한국사」. 이덕일. p.184~210
■ 경신환국 - 남인인 허적이 궁중의 기름천막을 쓴 것을 이유로 하여 남인을 축출, 서인등용 이때 남인의 처벌을 두고 남인을 처벌하려는 송시열의 노론과 남인과 화해하려는 윤중의 소론으로 나누어진다.
■ 기사환국 - 정권에 밀려난 남인들이 후궁 장옥정을 내세워 세력을 획득하려고 노력했다. 장옥정이 아들을 낳자 숙종은 세자로 정하고 종묘고묘까지 마쳤는데 서인인 송시열이 대놓고 반대하는 상소를 올리자 서인을 대거 축출하고 남인을 대거 등용하였다.
■ 갑술환국 - 서인이 후궁최씨(최숙원)로 정권을 얻으려고 하였고, 그 과정에서 남인 대거 축출되고 서인이 정권을 잡았다.
말년에는 장희빈을 죽이고, 남인을 몰락시킴으로써 서인의 기득을 용인하여 주고, 남인의 비호를 받고 있던 세자(장희빈의 아들 후에 경종)를 배척하면서 그 비극이 시작된 것이다.
숙종은 세자를 폐하고 최숙빈의 아들 연잉군과, 박명빈의 아들 연령군 중 하나를 후계자로 삼을 생각이었지만, 채 뜻을 이루지 못하고 사망하면서 서인들에게 세자가 아닌 연잉군과 연령군을 맡긴다는 유서를 남기고 승하한다.
■ 정유독대「살아있는 한국사」 이덕일. p.197
숙종과 노론이 비밀리에 만나 다음세자를 누구로 할 것인가에 대해 의논, 하지만 급사. 숙종은 유서에 세자를 연인군(영조)으로 하라고 남기고 죽는다.
서인들은 이를 세자가 아닌 연잉군에게 보위를 넘기고자 하는 대왕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새로 등극한 세자 즉, 경종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기에 이른다. 서인들은 이 경종을 두고 다시 두 파로 갈라지게 되는데. 경종을 왕으로 인정하는 온건 소론과, 경종을 왕으로 인정조차 하지 않던 강경 노론이었다.
노론의 세력이 주가 되었던 시기에 자신을 보호해줄 세력 없이 경종은 왕위에 등극했다. 그리고 곧 노론의 압력에 연잉군을 왕세제로 책봉하였고, 이듬해 왕세제에게 대리청정을 주청하는 노론의 요구에 이마저도 들어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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