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등소평 사후 중국의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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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중국] 등소평 사후 중국의 변화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론
Ⅱ. 현대 중국의 혼란
Ⅲ. 강택민 체제
Ⅳ. 강택민의 부정부패 일소운동
Ⅴ. 향후 중국의 방향
1. 제 1 시나리오 - 온건개혁
2. 제 2 시나리오 - 보수 회귀
3. 제 3 시나리오 - 급진개혁
4. 제 4 시나리도 - 천하대란
Ⅵ. 다양한 등소평 사후 중국 전망
Ⅶ. 결론

본문내용
78년 최고실권자가 된 등소평은 국가진로를 계급투쟁 중시의 극좌노선에서 사회주의 시장경제로 전환하는 혁명적 조치를 취했다.이는 중국사회를 철저히 변화시키는 '제2의 중국혁명'이었다. 개혁, 개방이 시작된 78년 3천5백88억위안(元)에 불과했던 국내총생산(GDP)은 95년 5조3천억위안으로 뛰어올랐으며,매년 10% 이상의 경제성장을 기록하는 눈부신 실적을 올렸다. 이같은 성장의 결과 중국은 미국,일본에 이은 세계 3위의 경제력을 쌓았으며,21세기 미국을 제치고 세계 제일의 경제대국이 될 것이라는 것이 전망이 나오고 있다. 이같은 경제적 성공에도 불구하고 등소평의 노선은 사회주의 고수라 는 원칙에서 한치 양보도 없었다.경제발전에 필연적으로 따라온 민주화 요구를 등소평은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지난 89년 6.4 천안문(天安門)사건은 등소평의 확고한 입장을 그대로 나타낸 것이며,그후유증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등소평의 사망에도 불구하고 정치구조는 당분간 안정을 유지할 전망 이다.천안문사건이후 갑자기 등장한 장쩌민(江澤民)국가주석은 그 동안 등소평의 후광(後光)을 업고 당.정.군을 한손에 잡은 최고 지도자로서의 입지를 강화해왔다. 그러나 江주석은 등소평과 같은 카리스마가 부족할뿐 아니라 국가를 끌고나갈 독자적 비전이 부족한 것이 단점으로 지적된다.또 군경력이 없는 테크너크랫 출신이란 것도 단점이다. 따라서 江주석을 정점으로 보수,개혁파가 권력을 나눠갖는 집단 지도 체제를 유지할 전망이다. 장쩌민 체제가 당면하게 될 문제는 간단치 않다.경제적으로 개방이후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는 지역간,계층간 빈부격차,재정적자를 가중시키고 있는 국영기업,높은 인플레율,사회 전반에 미만(彌滿)한 부정부패 등으로 불안한 상황이다. 정치적으론 천안문사건으로 드러나기 시작한 반체제,민주화세력의 도전 또한 만만치 않을 것이다. 또 최근 부쩍 늘고 있는 소수민족의 자치,독립요구 시위도 주의를 요하는 대목이다. 이같은 불안요인들이 정치적 혼란으로 이어질 경우 군부의 영향력이 커질 것이 분명하며,江체제의 군에 대한 통제 여하가 중요한 요인이 될 것이다. 이 같은 불안요소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변할 수 없는 것은 중국이 개방,개혁노선을 포기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점이다. 
 현재 중국 지도부는 보수,개혁진영 모두 개방,개혁의 필요성에 이견(異見)이 없으며,다만 개방,개혁의 속도와 그로 인한 부작용을 어떻게 줄이느냐에 이견이 있을 뿐이다.

Ⅱ. 현대 중국의 혼란

등소평이 경제적으로는 시장경제를 , 정치적으로는 사회주의를 고집하면서, 필연적으로 마찰을 피 할 수 없었다. 이미 시장 경제가 들어 서면 , 국민들에게는 빈부의 차이가 생기고, 또한 자유주의 사상이 들어 오기 마련이다. 그런데 아직 정치적으로는 사회주의를 고수 하므로 , 국민들은 반발하기 마련이다. 이런 와중에 생겨난 것이 1986년 대학생들의 만주화 시비이다. 그 당시 등소평은 대학생시위를 “부르주아 자유화”라는 이름으로 비난 하면서 , 자신의 오른 팔인 호유방(후야오방) 당총서기를 제가하여 일단 발등의 불을 껐다. 그러나 시위는 여기서 그친 것이 아니었다. 1989년 6월 천안문 사태가 터졌다. 이 사건은 전 서방세계에 생중계 되었으며, 많은 사람이 무력 진압으로 목숨을 잏었다. 이때도 등소평은 자신의 왼팔인 조자양(자오쯔양) 당총서기를 실각시킴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하였다. 그러나 앞으로도 불안요소가 없어진 것은 아니다. 경제 발전으로 말미암아 도시 농촌간의 격차가 커짐으로써 , 농민들이 불만을 품고 있다. 한 얘로 다음의 경우를 보자.

북경의 한 저명한 교수가 한 말이다.
“ 10년전 금의환향 했을땐 가족은 동네 잔치 까지 베풀었습니다. 큰 학자가 태어났으니 우리 모두의 자랑이라고 했었지요” 그러나 지난해 다시 귀향하자 상황은 180°로 달라져 있었단다. 잔치는 커녕 가족의 한숨섞인 넋두리만 귀를 때렸다. “죽자고 공부해 명성을 얻으면 뭘 하노 ...... 남들처럼 호의호식 한번 못하고 ......” 이 교수의 한달 월급은 1천원(약 10만원) . 1년 내내 원고를 써 책을 낸다면 고료로 2천원 정도 더 번다.
그런데 폭발아들의 초호화판 생활은 현대판 귀족 바로 그것이다. 한번 입장해 목욕하고 팔등신 미녀에게 마사지 받는데 1원쯤 드는 사우나에는 폭발아 단골들로 만원사례다. 거리마다 즐비한 가라오케에서 3~4명이 웬만히 즐기기 위해 2천~3천원 정도는 쉽게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