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문] 경주(신라) 답사 기행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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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답사문] 경주(신라) 답사 기행문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1. 개요
2. 안압지
3. 불국사
4. 석굴암(石窟庵)
5. 분황사
6. 칠불암
7. 양동 민속 마을
8. 부처바위
9. 용담정
본문내용
경주의 역사경관이 도시적 특성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은 斯盧六村이 발전하여 斯盧國을 형성하고부터 이다. 이들은 혈연공동체인 씨족국가로서 주변의 辰韓 小國들과 대항하기 위하여 모여 살게 되었고 도시를 형성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 경주시 역사경관의 모체가 되었다.
신라는 국가 開創 이래 56대에 걸쳐 992년간 경주를 신라의 王都로 이용하였으며 시대 발전에 맞추어 부단히 도성을 건설하였다. 당시 왕궁이었던 金城 지역은 현 瞻星臺 부근으로, 규모는 그리 장대하지 않았으나, 부족의 대표들이 모여 국가의 大事를 의논하고 제천의식을 행한 성스러운 장소이었다. 따라서 이 첨성대지역은 고대도시의 始原으로 경주 역사경관의 핵심지역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이 지역에는 경주의 역사경관 이미지 형성의 주요 요소인 고분군의 架空線이 두드러지게 나
타난다. 이들 고분군은 첨성대와 월성과 연결되는 역사경관의 고리를 형성하고 있고, 주변의 자연환경 보존상태도 양호하여 가히 이 지역은 신라의 역사성을 감지할 수 있는 경주 역사경관의 壓卷이라 할 만하다.
경주는 慈悲王代에 이르러 중국식 제도를 도입하여 坊里제를 실시하고 정비된 도시체제를 갖추기 시작하였으나, 完整한 도시경관을 갖추게 된 것은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룩한 文武王代 이다. 신라는 당시 강력한 대국인 唐의 영향력을 받아, 固有性이 강하였던 古新羅의 도시경관은 당 장안성의 영향이 강하게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신라의 도시경관은 당의 장안성과는 달리 외곽성을 축조하지 않았기 때문에 개방적이고 자연친화적이었다. 신라의 도성은 주변이 하천과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형이므로 정방형의 외곽성을 구축하는데 불편하였을 뿐만 아니라 주위 山上에 축조한 견고한 산성들이 포진하고 있기 때문에 별도의 외곽성 축조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였던 것이다. 또한 산악숭배사상과 풍수지리사상으로 주변 산상에는 산성이나 사찰을 건립하는 등 국가 裨補의 성지로 여겼기 때문에 도성 외곽의 산은 잘 보존되어왔고 매우 중요한 역사경관의 요소가 되었다. 당시에 도성 외곽의 숲은 도성의 虛한 곳을 補한다는 풍수개념으로 인식하였다. 경주 북측의 황성동 일대에 조성된 裨補林은 지금까지 近隣公園의 숲으로 보존되어 경주 역사경관의 중요한 요소가 되고 있다.
경주의 도시경관 구조에 주요 요소인 가로경관은 신라의 도성내에 개설된 주작대로와, 이와 연결된 大路와 中路, 小路의 격자형 가로망의 흔적들이 지금까지 남아 역사경관의 이미지를 형성하여 주고 있다.
신라의 도성은 56대 敬順王을 마지막으로 신라 왕경의 榮華는 사라지게 되고, 평범한 지방도시로 전락하게 된다. 고려 玄宗(1012년)은 군사목적으로 왕경의 서북부 평지에 읍성을 축조하여, 조선시대에 까지 존치 되었으나 일제에 의하여 헐리고 극히 일부분만 남아 있다. 당시의 성벽과 문루가 지금까지 존치 되었더라면 경주의 역사경관 구조는 판이하게 달라졌을 것이다. 성벽의 터는 도로가 개설되어 이용되고 있으나 지금은 더 이상 역사의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어, 아쉬움만 더할 뿐이다.
이후 경주는 고려의 徙民 정책으로 귀족들은 대부분 새로운 수도 開京으로 이주하였고, 그들이 살던 집은 頹落하였다. 거기에다 왕경내의 巨刹들과 지상에 남아 있던 건조물도 전란으로 대부분 소실되고, 옛 왕경 지역은 농지로 바뀌어 오늘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 지역이 바로 경주의 서남부일대의 역사경관을 형성하고 있다.
政變으로 고려왕조에서 조선왕조로 바뀐 후 경주의 도시적 지위는 변함이 없었다. 당시에 작성된 경주 邑內全圖에 나타난 읍성의 공간구조는 전형적인 조선시대 읍성의 공간구조로 관청위주의 공공공간이 읍성의 골격을 이루는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 여기에 客舍나 御廳에 이르는 도로만 개설하고, 나머지 관청은 객사의 좌우에 배치하도록 하였으며, 읍성내의 筆地는 세분화하지 않았다. 이러한 현상은 현대도시에 까지 그대로 이어져 대규모 필지로 구성된 법원, 경찰서, 학교, 교회 등의 부지로 이용하게 되었다. 당시의 도로체계는 다행히도 일제에 의해 전면적인 도시개조가 이루어지지 않아 지금까지도 당시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