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파] 일제시대 친일파 행동 양태와 을사오적(이완용, 박제순, 권중현, 이지용, 이근택) 심층 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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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친일파] 일제시대 친일파 행동 양태와 을사오적(이완용, 박제순, 권중현, 이지용, 이근택) 심층 분석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론

Ⅱ. 일제 시기 친일파의 행동 양태
1. 3.1 운동 무렵의 친일파
2. 일제 문화운동에 동원된 거물급 민족주의자
3. 내선일체의 기수들
4. 민족대표 33인 중의 훼절

Ⅲ. 을사오적
1. 친일파 이완용
2. 친일파 박제순
3. 친일파 권중현
4. 친일파 이지용
5. 친일파 이근택

Ⅳ. 결론
본문내용
해방 반세기에 가까운 오늘까지 친일파 또는 친일세력이 우리 사회의 지배계층을 형성해 왔고, 또한 이들은 영원한 기득층으로 세습화되고 있다. 친일세력은 민족통일보다 분단을, 민족자주보다 사대예속을, 민주주의보다 독재지배를 택했다. 이런 비정상에서만이 자신들의 입지를 확보할 수 있고, 기득권을 지킬 수 있기 때문이다.
밝은 태양 아래서는 살 수 없는 박쥐나 두더지처럼 이들은 분단과 독재와 부패의 늪지대에 또아리를 틀고 우리의 소중한 가치들을 짓밟아왓다. 직접 친일을 한 친일파는 물론 그들의 2세, 3세 또 그 잔당들은 지금도 우리 사회의 모든 부문에 걸쳐 실세로써 행세하고 있다. 이들이 세운 친일정권은 일본의 신군국주의 세력과 유착하여 경제에속을 가속화시키고, 소득격차․지역분열을 조장하여 갈등과 대립을 심화시키고 있다.

Ⅱ. 일제 시기 친일파의 행동 양태

1. 3.1 운동 무렵의 친일파

親日派에게 貴族 身分을 配給
1910년 6월부터 나남, 청진, 함흥, 대구의 일본군들이 한밤중 남의 눈에 뜨이지 않는 길을 통해서 서울로 진입해 왔다. 이들 응원 병력과 용산 주둔 일본군 제2사단의 철통 같은 경비망 속에서 8월 22일, 나라와 백성을 팔아넘기는 병합조약이 조인되었다.
이 일을 주동적으로 수행한 이완용. 박제순. 송병준 이하 76명에게 논공행상으로, 혹은 회유를 위해서 일제는 귀족의 신분을 배급했다. 후작(Marquis) 6명, 백작(Count) 3명, 자작(Viscount) 22명, 남작(Baron) 45명인데 김석진 등 8명이 남작의 수령을 거절했다. 이후 1920년대로 들면서는 이완용이 백작에서 후작으로, 고희경과 송병준이 자작에서 백작으로 승급사고 이완용의 차남인 이항구에게 추가로 남작이 수여된다. 이리하여 작위를 받은 최종 숫자는 후작 7명, 백작 4명, 자작 20명, 남작 38명으로 총원 69명이 되었던 것이다.
이 69명 중 김가진(남작), 김사준(남작), 김윤식(자작), 이용직(자작), 이용태(남작)가 독립운동을 하다 작위를 잃었다. 남은 64명 중 민영린(백작), 윤택영(후작), 조민희(자작)가 파산 또는 품위 실추로 작위를 잃는다. 조희연은 사후에 남작을 반납했다. 윤웅렬의 남작은 장남 윤치로가 상속했으나, 총독 암살 음모라는 날조된 죄-105인 사건-를 덮어씀으로써 1913년 10월에 박탈을 당한다. 남은 59석이 대체로 무사하게 일제 말엽까지 물려졌는데, 내역은 후작 6명, 백작 3명, 자작 17명, 남작 33명이다.
이 부류 일제의 귀족 계층은 3.1운동에까지 등을 돌렸다. 만세 봉기가 나자 이완용은 [매일 신보]. [경성 일보]에 전후 3차의 배역 담화를 발표했다. 가라사대 3.1운동은 "사리를 분별치 못하고 나라의 정세를 알지 못하는 자의 輕擧妄動이다. 그들의 妄動은 스스로 죽음의 길을 택하는 것일 뿐"이며, 조선인의 행복은 대일 투쟁이 아닐 실력의 양성에서만 찾아질 수 있다는 타령이었다. 송병준은 임오군란 때 남대문 밖 농가의 쌀뒤주 속에서 숨어 사는 등 기타 10여차의 피습 사건으로 혼쭐깨나 났던 사람이다. 그 때문인지 이 자는 3.1운동이 터지자마자 재빨리 도쿄로 달아나 버렸다." 소요가 발발하여... 수습이 어려워지려 하자...이를 좌시하며 경성에 태연히 있을 수 없어 분연히 폐하의 발 아래로 와 버렸던 것이다. 그는 일본에서 정계 요인들과 접촉하면서 만세의 진압과 민심 수습책을 의논하였다.
이지용은 고종의 종질이다. 이 자 또한 이완용의 생질인 거물급 매판자본가 한상룡과 함께 동경으로 가서 만세 수습을 의논했다. 남작 박제빈은 총독에게 민심수습의 건의서를 올렸고, 장석주는 무력으로 만세를 소탕하라고 핏대를 올렸다. 김종한은 원래가 조선인은 "청국의 속국으로 독립 혹은 공화"라는 말조차도 몰랐는데, 청일전쟁 때 일본이 "독립국으로 이왕에게 황제를 호칭하도록 해주었기 때문에 '독립' 두 자를 알고 이번의 소요 사건"을 일으켰다고 투덜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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