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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시] 한시 심층 분석 및 사례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론
Ⅱ. 구비의 확산과 한시의 구비수용 양상
Ⅲ. 한시의 기본악보
1. 한시의 종류
2. 운
3. 작시법의 호칭
4. 평측도
5. 사성의 구분
1) 소리의 구분 방법
2) 시작의 운은 어떻게 정하나
3) 사성의 표시
6. 평측도의 자리 매김
1) 오언의 원칙과 운용의 실제
2) 칠언의 원칙과 운용의 실제
Ⅳ. 민요와 한시
1. 사랑노래의 흐름
2. 이언(俚諺)이라는 제목과 민요풍 한시의 흐름
3. 민요풍 시에 대한 이옥의 이해
4. 왜 남녀 사이의 정을 노래하였나
5. 한시와 민요의 거리
Ⅴ. 만해 한용운 한시의 시세계
1. 자연 풍류시
2. 우국과 저항의 고뇌
Ⅵ. 의병한시
Ⅶ. 김삿갓을 통해 본 한시속의 해학
Ⅷ. 정몽주 한시의 한시사적 의미
Ⅸ. 결론
본문내용
옛 음악이 없어진 이후로 악부가 흥하였다. 그 후에 악부의 노래하는 법이 당에 전해지지 않게 되자 당의 노래하는 것은 모두 절구였다. 당인의 시를 노래하는 법은 송에서 또한 전해지지 않았으니 송에서 노래되는 것은 모두 사였다. 송인이 사를 노래하는 법은 원에 이르러 역시 점차 전해지지 않으면서 곡조가 지어지게 되었다.
이 인용문은 중국문학의 연변과정을 음악적인 관점에서 서술하고 있다. 중국에서 각 시기마다 문학양식이 새로이 부상하는 것은 전시대의 문학양식이 관습으로 남고, 실제 가창과는 거리가 있게 될 때 새로운 음률에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이다. 이렇게 하여 각 시기마다 대표적인 문학 양식이 완성되며 이는 단순한 기록물이 아닌 음악으로 향유되었다. 따라서 중국문학은 음악으로서의 새로운 시형의 모색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고대의 시경체, 한의 악부, 육조의 오언시, 당의 근체시, 송의 사, 원의 곡이라는 시양식의 맥락이 형성된다. 이들은 모두 가창된다는 의식이 있었고, 특히 고대의 시경체는 민요를 바탕으로 한 것이기에 ꡐ요=가=시ꡑ라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점차 민요는 평민의 문학이므로 비속하다는 의식이 싹트고 상층계급이 자신들만의 노래를 독립시켜 새로운 양식을 만들어 이를 ꡐ시ꡑ라고 이름짓기 시작한다. 이것이 바로 육조시기의 오언시이며 이러한 문학의 양분현상은 더욱 가속화된다. 그러나 육조의 오언시들도 여전히 가창되었고 음악적인 효과를 높이기 위하여 자체내에 성률이라는 음률상의 장치를 마련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이 장치는 오히려 시를 음악과 분리시키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고대에 말하는 시송은 모두 김죽의 악기로 연주되었다. 그러므로 오음의 조화가 아니면 맞추어지지 않았다. , 같은 것은 음률의 으뜸이 되니 삼조(조조, 조비, 조식)의 사문이 공고하지 않더라도 음률이 가창되었다. 이 성률을 중히 여기는 말은 세상에서 일컫는 궁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이미 관현의 악기로 연주되지 않고 있거늘 어찌 또한 성률을 맞추려 하는가
이 글을 통해 보건대 육조 초기인 건안 연간에 지어진 오언시는 수식이 화려하지 않지만 모두 관현에 올려져 가창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다가 종영이 활동한 육조 말기에는 성률의 속박으로 인하여 오언시는 더 이상 가창되지 않고 음영의 대상이 되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육조의 시는 후기에 이를수록 현실에서 이탈되고 진실에서 벗어나서 화려, 부염을 추구하는 형식주의 기풍으로 나아가게 된다. 이러한 여러 경향이 혼재해 있던 시기에 소통이 찬한 문선에 수록된 오언시는 가창되지 않은 것이다. 소통이 화려한 것은 부화할 수 있기에 부염한 것은 수록하지 않는다는 편찬의식을 지녔었다는 것은 여기에 실린 시들이 실제 노래로 불리지 않은 순수한 ꡐ시ꡑ라는 사실과 일치한다. 반면에 오언시 가운데 가창된 작품을 모아 놓은 것이 옥대신영인데 여기에 실린 시들은 강한 악곡성으로 말미암아 유흥적인 내용과 화려한 수식이 드러난다. 즉 가창을 목적으로 하면 그 시는 화려, 부염해지므로 소통은 악곡성이 없는 작품을 선별하여 문선에 수록하였을 것이다.
우리 나라의 한시 작품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삼국시대 말기는 바로 육조말기와 육조의 시풍을 이은 초당 연간이다. 앞서 살폈듯이 한자는 보급되었지만 한시가 전혀 창작되지 않다가 이 시기에 이르러서 한시작품이 보이는 것은 바로 한시가 미미하지만 음악으로서의 성격에서 벗어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그 동안은 중국의 음률에 맞게 고안된 한시를 우리 나라 사람들은 창작할 수도 없었고 창작할 필요도 없었다. 그들이 하층의 민요와 상층의 한시를 지니고 있었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민요와 이를 정제한 가창의 문학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가창의 문학 가운데 신라의 것은 향찰이라는 기록의 수단을 얻어 향가로 남게 된 것이며 고구려나 백제에도 이와 유사한 양식이 있었다고 추정되나 현재 전하지 않을 따름이다. 그런데 육조말기에 이르면 이제 시가 가와 점차 분화되기 시작하고 음악성이 배제된 문선이 우리 나라에 수용되면서 우리 나라 사람들도 한시를 창작할 수 있는 배경이 마련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