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 중국, 일본, 캐나다, 미국의 한국 선교와 북한 선교 심층 고찰

 1  [선교] 중국, 일본, 캐나다, 미국의 한국 선교와 북한 선교 심층 고찰-1
 2  [선교] 중국, 일본, 캐나다, 미국의 한국 선교와 북한 선교 심층 고찰-2
 3  [선교] 중국, 일본, 캐나다, 미국의 한국 선교와 북한 선교 심층 고찰-3
 4  [선교] 중국, 일본, 캐나다, 미국의 한국 선교와 북한 선교 심층 고찰-4
 5  [선교] 중국, 일본, 캐나다, 미국의 한국 선교와 북한 선교 심층 고찰-5
 6  [선교] 중국, 일본, 캐나다, 미국의 한국 선교와 북한 선교 심층 고찰-6
 7  [선교] 중국, 일본, 캐나다, 미국의 한국 선교와 북한 선교 심층 고찰-7
 8  [선교] 중국, 일본, 캐나다, 미국의 한국 선교와 북한 선교 심층 고찰-8
 9  [선교] 중국, 일본, 캐나다, 미국의 한국 선교와 북한 선교 심층 고찰-9
 10  [선교] 중국, 일본, 캐나다, 미국의 한국 선교와 북한 선교 심층 고찰-10
※ 미리보기 이미지는 최대 20페이지까지만 지원합니다.
  • 분야
  • 등록일
  • 페이지/형식
  • 구매가격
  • 적립금
자료 다운로드  네이버 로그인
소개글
[선교] 중국, 일본, 캐나다, 미국의 한국 선교와 북한 선교 심층 고찰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론

Ⅱ. 선교와 선교사 훈련

Ⅲ. 주변국들을 통한 한국 선교
1. 중국을 통한 한국 선교
2. 일본을 통한 한국 선교
3. 캐나다 교회의 한국 선교
4. 미국의 한국선교

Ⅳ. 북한 선교
1. 북한 민중의 종교 개념
1) 구시대인들과 입장
2) 새시대인들의 입장
2. 선교사역에서 전략적 문제

Ⅴ. 결론
본문내용
초대교회 당시 기독교 선교는 신학의 손자가 아니라 신학의 어머니였다. 성경의 인도 아래 바울은 선교를 위해 그의 신학을 체계화했고, 선교로써 그것을 나타내었다. 그는 항상 외인(골로새서4:5, 데살로니가전서3:12) 을 염두에 두고 그의 신학을 체계화했다. 바울이 다른 크리스챤에 대해 소송을 제기하는 크리스챤들에게 수치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을 때, 바울은 영적인 외인들을 염두에 두었다(고린도전서6:1~5). 영적 은사들에 관한 그의 신학적 신중함은 이러한 은사들이 불신자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 것인가 하는 점과 교회에 대한 그의 목자적인 감성에 기인한 것이었다(고린도전서14:23~24).
16세기의 신학적 부흥 역시 같은 형식을 취했다. 선교의 부흥이 신학적 활동의 부흥을 낳은 것이다. 신조들과 교리들은 순수한 복음전파를 위한 신앙고백으로 생겨났다. 복음전파는 소책자나 일곱 색깔의 월 챠트(Wall Chart)로 만족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 최대 번성기에도 북반구의 신학은 선교에 반영되는 데 불과했고 문화를 그리스도께 인도하기 위해 노상에서 외치는 순례에 반영될 뿐이었다. 또한 당신의 신학은 선교에 대한, 좋은 소식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또 빛과 소금, 누룩 및 좋은 소식의 전달자와 표본으로서의 교회에 관한 사상이었다. 신도들은 단순히 신학의 선교적 과업의 반영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학교에서 가르치는 신학 가운데 선교의 중요성이 종종 결여되어 왔다. 복음주의적 저자 인 데이빗 보쉬(David Bosch)는 신학이 점점 철학을 유일한 외적 동반자로 하는 형이상학적 사고의 학문이 되어간다고 주장했다. 그 과정에서 신학은 흔히 신학을 탄생시킨 선교의 추진력을 강화시키기도 했다. 제3세계(또는 twothrids world)의 형제들은 신학이 모(母)교회들의 축적을 통해 자(子)교회들에게 분배되는 사치품이 되어간다고 말하고 있다. 성경과 세상 사이의 선교적 대화로서의 신학 방법은 그 대화의 결과 너무도 자주 선교가 결여된 신학으로 축소되고 있다.
그 결과, 다른 종류의 복음주의적 신학이 제3세계에서 발전하고 있는 듯하다. 이 신학은 북반구의 주류를 이루는 복음주의 신학자들이 주로 다루지 않은 질문들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 새로운 신학은 철저하게 성경을 신학의 원천과 규범으로서 인정한다. 성경은 지금도 신학적 견해를 내놓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믿음을 통해 은혜로 말미암는 구원은 여전히 그들에게 복음주의적 확신으로 울려퍼지고 있다. 또 새로운 삶에의 초청은 여전히 신자들 안에 역사하는 성령 사역의 증거로 여겨지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오를란도 코스타스(Orlando Costas)는 이렇게 말했다. 제3세계의 복음주의 신학자들은 그들의 영적 전통의 우수함을 인정하고 그들의 역사적 공간 안에서나 밖에서나, 그것을 그들의 대화자와의 구조 비평적 대화에 적용하고 있다. 그들에게 있어서의 신학은 서구의 사회 문화적 경험에 얽매여 있지 않다. 그들은 자기들의 이슈에 비추어 자신들의 용어를 가지고 복음주의 전통을 신학적으로 이야기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신학의 복음주의적, 선교적 중요성을 재발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왜 이것이 난제가 되는가 이것은 북반구의 백인들에게 위협이 될 수 있다. 만약 우리가 그들의 독특한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남반구의 신학은 맑스주의 이론에서 비롯된 형태나 모슬렘과 타협한 혼합주의인 것처럼 우리에게 들릴 수 있는 것이다. 즉 신학의 선교적 과업에 대한 새로운 고찰이 없을 경우 그 신학들은 너무 국지적 이어서 영구적이 될 수 없다거나 너무 특수해서 보편적이지 못하다고 여기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에 대한 우리의 진지한 대응이 없으면 이 신학들은 점점 더 우리를 위협할 것이다. 신학의 상황화는 마치 차의 뒷문으로 올라타는 혼합주의나 성도들에게 유일무이하게(once for all) 전해진 그 복음을 파괴하는 상대주의처럼 우리 백인들에게 들리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