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문학] 김시습에 대한 작가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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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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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서 론

본 론

(1) 김시습의 생애
(2) 김시습의 문학적 생애
(3) 김시습 방외인으로서의 삶
Ⅱ. 김시습의 사상과 문학관
Ⅲ. 김시습의 작품활동
Ⅳ. 김시습의 삶에 대한 의견들
Ⅴ. 를 통해 본 작가 김시습
Ⅵ. 매월당문집(梅月堂文集)을 통해 본 김시습

결론



본문내용
② 방랑기 (放浪期) : 21~30세
삼각산 중흥사에서 독서하고 있을 때, 단종이 유충으로서 등극하였다가 곧 세조에게 찬찬을 당하였다는 소문을 들은 21세인 시습은 대성통곡하면서 서적을 모두 불살라 버리고는, 머리를 깎아 중이 되어 금강산에 들어가서 「오세암」이란 암자를 지어놓고 거처하면서 자기의 호를 「설령」이라 하니 그때가 바로 24세였다. 그는 금강산으로 들어가기 전에 노량진에서 사형을 당한 사육신의 사체를 두려워서 아무도 수습하는 이가 없는 것을 개탄하고는, 밤중에 삼각산에 서 내려와 구릉에 매장하고는 올라갔다고 하는데, 시습으로 인하여 오늘날 사육신묘가 있게 되었다고 한다. 광인으로 자처한 그는 남루한 옷을 입고 새끼 띠를 띠고 폐양자를 쓰고는 걸반 승으로 돌아다니면서 지처에서 왕태를 연출하였다고 하는데, 하루는 서울 종로 테거리에서 판 서 서거정의 행차를 만난 그는 행차를 가로막고 「강중아 그 사이 잘 있었나」고 하였다. 서거정은 웃으면서 응대하였는데, 보는 사람들이 모두 놀랬다고 한다.
방랑기 때의 그의 행적과 내력이 분명하지는 않으나 자신의 술회서인 사유록에 의하면 21세 에서 24세에 이르는 기간은 송도․평양 등 관서지방을 향하였으며, 25세에서 26세에는 금강․ 오대 등 관동지방을, 27세에서 30세 사이에는 백제 고도 호남지방을 두루 편력하고 있다. 김시 습은 29세 되던 세조 8년(1462)에 서차 상경했다가, 효녕대군의 간청에 따라 세조의 불경언해사 업을 잠시 도와 내불당에서 교정을 밭아 보다가, 마지막으로 영남 유람의 길을 떠나 경주의 금 오산을 찾아보고는, ‘만수궁한’을 위했던 방랑의 생활을 청산하고, 영주의 보급자리를 마련하기 위하여 금오산실을 복책하였다. 이렇게 하여 김시습은 30세부터 37세까지 금오산실에 은거하 면서 구우의 ‘전등신화’를 탐독하고, ‘金鰲新話’를 지었을 것이다.

③ 금오기 (金鰲期) : 31~36세
김시습은 31세 되는 세조 11년(1465) 봄에 짐을 꾸려 경주로 내려가서 경주 남산 금오산 금 오산실을 복책하고 그곳에서 일생을 마치기로 한다. 근는 금오산 남변 동구에 있는 용장사라 는 절간에 머물렀으며, 매월당이란 그의 서재를 근거로 하여 신라 고도와 천년유지를 널리 노닐면서 인생과 자연을 해석하고 사색한 나머지 를 썼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현재 전하는 문헌으로는 금오기 이후에 그가 다시 경주로 간 흔적이 없으며, 또 이 시기 이후 의 그의 시문을 보면 매양 그가 금오산실로 가지 못하여 그리워하기도 하고 또 꿈에 그곳에 가서 놀았다는 내용의 글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의 제작연대는 금오기로 보는 것 이 마땅하다. 그리고 그의 이 금오기는 건강이 아주 좋지 못하여 병상에서 매우 신음하고 있었던 것임을 당시에 지었던 그의 시문을 통하여 짐작하게 하는 바 그 만큼 그는 한층 더 인생 과 자연을 심각하게 관찰하고 해석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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