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군신화] 단군신화의 역사인식과 단군정신 및 홍익인간이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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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단군신화] 단군신화의 역사인식과 단군정신 및 홍익인간이념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Ⅰ. 개관
Ⅱ. 단군신화의 의미
1. 문학적 측면에서
2. 민속학적 측면에서
Ⅲ. 단군릉 발굴과 변화된 북한의 역사인식
1. 단군신화의 역사적 사실로서 인정
2. 평양 중심 우리 민족의 단일민족 기원설 주장
3. 고조선 중심지에 대한 인식의 변경
Ⅳ. 단군정신
1. 생명나무 사상
2. 만민평등 사상
3. 기타
Ⅴ. 홍익인간이념의 현대적 의의
1. 사회의 정화와 통합
2. 민족화합과 남북통일
3. 건강한 민족정체성 확립
4. 세계화 추이의 감시 및 부작용의 극복
5. 한민족의 이상으로서의 홍익인간이념
본문내용
현재까지 전하는 단군신화는 고려 왕조 충렬왕 재위시에 보각국존(普覺國尊)이었던 일연(一然: 金見明, 1206-1289)에 의하여 편찬된 삼국유사(三國遺事, 1280년경)에 인용된 ꡐ고기ꡑ(古記)의 내용이 가장 원형에 가깝다. 단군신화가 13세기에 생존했던 승려에 의하여 한문으로 편찬되고 기록되어서 고려의 사회 문화적 요소가 원형적 내용 안에 첨가되어 있음이 발견되지만, 역사 과정 속에서 구전(口傳)을 통해 전승되어온 신화의 조형구조(祖型構造)가 보존되어 있어서 한국인들의 하느님 관념과 종교적 의식 구조 일반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조선에 앞선 고려시대의 기록이면서 이 신화 안에는 ꡐ고조선ꡑ(古朝鮮)이라는 표현이 사용되고 있다. 이는 기자 조선이나 위만조선의 이전의 옛 조선으로서의 ꡐ고조선ꡑ(BC 2333-195년)을 나타낸다고 보아야 할 것이고, 또한 고대 아시아인들의 상징적 동물인 곰의 이야기가 들어 있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이 단군신화를 고대 조선의 하느님 신앙을 표현하는 원형적 민족신화라고 볼 수 있다. 단군신화의 내용을 ꡐ삼국유사ꡑ를 중심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옛날에 하늘 나라의 임금인 환인(桓因, 天帝)에게 여러 아들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환웅(桓雄)은 천하를 다스리고 인간 세상을 구원하려는 뜻을 지니고 있었다. 환인이 그 뜻을 알고 천하(三危太白)를 두루 살펴보니 태백산이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기에(弘益人間) 알맞은 곳이라 여기고, 천부인(天符印) 3개를 주면서 내려가 다스리게 하였다. 환웅이 무리 3천을 거느리고 태백산 꼭대기의 신단수(神檀樹) 밑에 내려와서 이곳을 신시(神市)라 일컫고 천왕(桓雄天王)이 되었다. 환웅천왕(桓雄天王)은 풍백(風伯)?우사(雨師)?운사(雲師)를 거느리고 곡식(穀)?생명(命)?질병(病)?형벌(刑)?선과 악(善惡)등 무릇 인간의 360여 가지 일을 맡아서 세상을 다스리고 교화하였다. 그때에 곰 한 마리와 범 한 마리가 같은 굴속에 살면서 항상 환웅에게 빌기를 '원컨대 사람이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였다. 한 번은 환웅이 신령한 쑥 1자루와 마늘 20톨을 주면서 말하기를 '너희들이 이것을 먹고, 100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아니하면 곧 사람이 되리라'고 하였다. 곰과 범이 이것을 받아서 먹고 근신하기 삼칠일(三七日) 만에 곰은 여자의 몸이 되었으나, 범은 삼가지 못하여 사람이 되지 못하였다 웅녀(熊女)는 자신과 혼인해 주는 이가 없으므로 또 신단수 아래에서 축원하기를 '아이를 배어지이다'하였다. 환웅이 이에 잠깐 변하여 결혼하여 아들을 낳으니 이가 단군 왕검이다. 왕검은 요(堯) 임금이 즉위한 지 50년 후인 경인년에 평양성에 도읍하고 비로소 조선(朝鮮)이라 일컬었다. 이어서 도읍을 백악산(白岳山) 아사달로 옮겼는데 이곳을 궁흘산 또는 금미달이라고도 하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