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이육사의 작품과 생애에 대한 연구] 시인 이육사의 작품과 생애에 대한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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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시인 이육사의 작품과 생애에 대한 연구] 시인 이육사의 작품과 생애에 대한 연구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일제 식민지 차하의 암울한 민족사적 수난의 시대를 치열한 저항의 정신으로 맞서 싸워 나갔던 대표적 민족시인, 그가 이육사이다. 행동하는 지성의 시인, 비극적 초월과 초극의지, 절명지의 꽃 등으로 불리어지는 시인 이육사의 생애와 작품 세계는 오늘날 가장 고귀한 문학적 유산의 하나로 남아 있다. 억압의 현실, 민족 말살의 참담한 역사적 상황에 온몸을 던져 응전했던 인간의 모습이 이육사이다. 민족적 양심을 끝내 지켜 내면서 격렬한 저항과 투쟁의 삶을 살았고, 그러한 정신의 치열성을 시로써 승화해 낸 몇 안 되는 지조의 시인이 이육사였다.
그는 청포도처럼 맑은 감성을 지녔으면서 광야처럼 드넓은 무대에서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들었고 그러한 자신의 모습에서 아름다운 비극적 황홀의 광채를 남긴 인간이기도 하였다. 1930년대 후반 수많은 지식인들이 강요된 식민지 상황 속에서 순응하거나 변절하거나 굴복하였을 때 오히려 더욱 강렬한 모습으로 자신의 삶을 내던짐으로써, 이육사는 이 시기의 우리 문학사에서 드물게 보이는 고귀한 정신의 시인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육사의 시는, 현실에 대한 사회적 반응으로만 채색된 것은 아니었다. 그의 시는 낭만적 향수와 애틋한 그리움의 정서를 지닌 것이면서, 때로 인간의 나약함과 불안함을 솔직하게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의 공감을 자아낸다. 아울러 그의 시에서 보여 지는 정신의 강인함은 대륙적 넓이의 광활한 공간 의식과 아득한 과거로부터 영원한 미래로 이어지는 시간 의식을 지녀 우리 시의 폭을 넓히는 데 기여하였다.
육사의 시가 지닌 진정한 가치는 불행한 민족의 현실 속에서도 미래에 대한 보기 드문 긍정적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우리는 육사의 시에서 기다림의 미학을 읽어 낼 수 있기도 하다. 그것은 현실로부터 한 걸음 비켜서서 관조할 줄 아는 고독한 교양인의 몫이기도 하고, 자신의 신념에 대한 확고한 믿음으로부터 우러나는 실천적 지성의 표현이기도 하다. 육사의 문학이 오늘의 우리 삶에 끼치는 영향은 이처럼 지대하다.

Ⅱ. 본 론
1. 이육사의 생애
육사의 시세계를 살펴보기 위해 그가 출생한 1904년부터 사망한 1944년까지의 40년이란 짧은 생애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시정신은 인간 이육사의 정신이기 때문에 그의 생애와 그가 남긴 글을 통해 드러난 정신과 필연적인 관련성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시작품 분석에 못지않게 생애를 검토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지금까지 널리 인정되는 육사의 행적은 대체로 세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전기는 출생하여 20세(1904~1924)까지로, 이 시기는 성장․교육기이다. 이 시기는 향리에서 한학을 수업하고 사회적 교육기관에서 비정규적으로 교육을 받는다. 그리고 혼인을 하여 비로소 고향을 떠난다. 이러한 교육과 독서 등이 그의 세계관을 형성하는 기초가 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중기는 21~30세(1925~1934)까지로, 사회적 활동기에 해당한다. 알려진 바로 이 시기에 일본과 중국으로 여행하고 義烈團에 가입하여 모종의 비밀업무를 수행하고, 북경대학 사회학과에서 수학했으며, 조선군관학교를 졸업한 것으로 되어있다. 또한 이러한 과정에서 日警에 검거되어 ‘17번’에 이르는 감옥살이를 시작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후기는 31~40세(1935~1944)까지로 문학 활동기에 해당한다. 다양한 문학 활동 중에 모종의 임무를 수행한 것으로 본다. 문필활동은 1942년에 그치고 그 뒤 어떠한 일에 관련되어 獄死하게 되는 시기이다.
육사는 그의 길지 않은 생애를 통해서 항일 독립 운동에 전념하였고 문단 생활에 관계하거나 시인으로서 자신을 내세우지는 않았다. 그는 문단의 어느 유파나 그룹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여 작품 활동을 하지는 않았다. 다만 자신의 내면에서 넘쳐나는 조국 광복에 대한 애타는 염원과 고향에 대한 향수와 그리움, 혹은 쫓기는 자의 무시무시한 고독감을 시로써 표현하였다. 그의 시는 「광야」나 「절정」에서 보듯이 기다림의 의지와 초인의 자세로 점철되어 있고, 대륙풍의 남성적 풍모를 띠어 우리 문학의 지평을 넓혔다. 또한 식민지 상황에 대한 고발과 고향 잃은 자의 안타까움 및 향수와 동경을 담고 있다.
육사의 시에 보이는 지순한 낭만주의적인 경향은 이러한 그의 내면세계와도 관계가 있다. 「청포도」와 같은 시에서 보여 지는 순수함과 청결함, 낭만적 우아함의 아름다움은 육사 시의 한 축을 형성하는 바탕이었지만 육사의 대표시들에 나타나는 특징적인 경향은 미래에 대한 단호한 확신과 비극적 상황을 초극하고자 하는 의지적 자세였다.
그는 수필 「계절의 5행」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되리라고 배워 온 것이 세 살 때부터의 버릇이었다’고 쓰고 있다. 눈물을 보이지 않는 사나이다운 모습, 어떠한 고통과 난관에 처하더라도 단호한 자세로 이에 맞서 이겨 나가는 정신이 몸에 배었던 육사의 정신은 어린 시절부터의 교육에서 닦아졌던 것이다. 그는 또한 ‘들개에게 길을 비켜 줄 수 있는 겸양’을 보일지언정 ‘정면으로 달려드는 표범을 겁내서는 한 발자국이라도 물러서지 않으려는 내 길을 사랑할 뿐이오’라고도 쓰고 있다. 상황에 대한 치열한 대결의 자세는 육사가 자신의 삶이 마주한 비극적 현실에서 결코 패배할 수 없었던 정신의 소유자였음을 보여준다. 그는 불안 속의 긴장이 연속되는 현실 속에서 아무런 보상도 있을 수 없는 행동의 결과를 미리 알면서도 결코 자신의 길에서 물러나지 않겠다는 신념과 초극의 정신을 지녔던 것이다.
연도(나이)주요 사건1904(출생)5월 18일(음 4.4) 경북 안동시 도산면 원천리(당시 원촌동) 881번지에서 진성 이씨 이가호(퇴계 이황의 13대손)와 허형의 딸인 허길 사이에 차남으로 출생, 본명 원록, 두번째 이름이 원삼, 자는 태경1909(6)조부 치헌 이중직에게서 소학 배우기 시작1916(13)조부 별세, 가세가 기울기 시작, 한문학 수학, 이 무렵 보문의숙에서 수학1919(16)도산공립보통학교(보문의숙을 공립으로 개편) 1회 졸업1920(17)안동시 녹전면 신평리 듬벌이로 이사, 부모를 비롯한 가족 모두 대구(남산동 662번지)로 이사, 석재 서병오에게서 그림을 배움, 동생 원일은 글씨를 배워 일가를 이룸1921(18)영천군 화북면 오동 안용락의 딸 일양과 결혼, 처가에서 가까운 백학학원(1921 설립)에서 수학(보습과 과정-1922년까지), 둘째 이름 원삼을 사용1923(20)백학학원에서 교편 잡음(9개월 동안)1924(21)4월 학기에 맞추어 일본 유학
경찰 기록-도쿄쇼우소쿠 예비학교, 니뽄 대학전문부 재학
검찰 신문조서-킨조우고등예비학교 1년간 재학1925(22)1월에 귀국, 대구 조양회관을 중심으로 활동, 이정기․조재만 등과 어울리며 베이징 나들이1926(23)베이징에서 수학, 광뚱성 광저우 쭝산대학에서 후학기 수학(이활 이름 사용)1927(24)쭝산대학에서 전학기 다니다가 여름에 귀국, ‘장진홍 의거(10월 18일)’에 연루되어 구속됨1929(26)5월에 석방(12월에 무혐의로 종결), 중외일보 기자1930(27)1월 3일 첫 시 「말」을 조선일보에 발표(이활), 아들 동윤 태어남(만 2세에 사망), 10월 이활, 대구(大邱) 이육사 이름으로 「대구사회단체개관」을 『별건곤』에 발표1931(28)1월에 ‘대구격문사건’으로 구속, 3월에 석방, 잦은 만주 나들이
8월 조선일보사(대구지국)로 전근, 3개월 머물다 연말에 귀국1932(29)4월 펑티엔으로 감, 베이징․텐진에 머뭄, 6월 상하이에서 루쉰 만남, 9월 베이징에서 난징으로 이도아고, 10월 20일에 난징 근교 탕산에서 문을 연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1기생 학원(學員)으로 입교1933(30)4월 20일 1기생으로 졸업(26명), 졸업식에 연극 공연, 5월에 상하이로 이동, 7월에 서울로 잠입1934(31)3월 결기도 경찰부에 체포됨
4월에 『대중(大衆)』창간호에 평문 「자연과학과 유물변증법」게재됨
3월 22일 군사간부학교 출신 드러나 구속됨(동기생이자 처남인 안병철이 자수한 후 졸업생 연이어 검거됨), 6월 ‘기소유예 의견’으로 석박(8월 기소유예 확정), 시사평론 다시 집필 시작1935(32)정인보 댁에서 신석초 만나 친교, 다산 정약용 서세 99주기 기념 『다산문집』간행에 참여, 신조선사의 『신조선』편집에 참여, 본격적으로 시 발표1936(33)7월 동해송도원(포항 소재)에서 휴양1937(34)서울 명륜동에서 거주, 평문 성격 바뀜(시사에서 문학으로)1938(35)신석초․최용․이명룡 등과 경주 여행, 가을에 신석초와 부여 관람, 11월 부친 회갑연1939(36)종암동 이사, 「청포도」발표1940(37)시 「절정」,「광인의 태양」등 발표1941(38)2월 딸 옥비 태어남, 폐질환으로 성모병원 입원, 부친상1942(39)2월 성모병원 퇴원, 모친과 백형 별세하여 원촌 큰집으로 귀향
7월 신인사지(옥룡암)에서 요양, 서울 수유리 거주1943(40)1월 신정에 석초에게 베이징행 밝힘, 한글 사용 규제 받자 한시만 발표
4월에 베이징으로 감, 충칭과 옌안행 및 국내 무기 반입 계획 세움
7월 모친과 맏형 소상에 참여하러 귀국, 늦가을(혹은 초가을)에 피검, 베이징으로 압송됨, 베이징 주재 일본총영사관경찰에 구금된 것으로 추정됨1944(41)1월 16일 새벽, 베이징의 어느 감옥(베이징주재 일본총영사관 감옥일 듯)에서 순국, 동지이자 친척인 이병희(여)에 의해 시신 거두어져 장례 치러짐, 원창에게 유골 인계되어 서울 미아리 공동묘지에 안장(1960년에 고향 원촌 뒷산으로 이장)1945동생 원조가 유시 「꽃」,「광야」소개1946원조에 의해 『육사시집』출판됨※ 연 보
2. 이육사 시의 구조적 특징
(1) 육사 시의 형태 구조
대부분의 육사의 시 작품들은 정형적 형태 구조를 취하고 있다. 육사의 시에서는 하나하나의 시마다 규칙적인 형태적 질서와 균형을 추구하는 분연 의식의 정형성이 두드러진다. 이처럼 거의 기계적인 형태 구조의 정형성을 바탕으로 육사는 안정감 있는 시적 구성을 추구하였다. 일정한 분량의 시행을 연 단위로 규칙적으로 반복하는 육사의 작시법은 그의 시가 지닌 고전적 형식미를 이해하는 열쇠가 된다.
이처럼 연 단위의 리듬이나 구성에 대한 규칙
참고문헌
조창환, 『이육사 - 투사의 길과 초극의 인간상』, 문학의 이해와 감상 108, 건국대학교출판부, 1998
강창민, 『李陸史 詩의 硏究』, 국학자료원, 2002
심원섭 편주, 『원본 이육사 전집』, 집문당, 1986
김희곤, 『새로 쓰는 이육사 평전』, 지영사, 2000
하고 싶은 말
제가 직접 한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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