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방송보도 레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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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방송보도 레포트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1. 방송보도란
2. 방송보도의 특성
1)신속성
2)현장성
3)광범위성
4)친근성
부정적인 특성

3. 한국방송보도의 역사
1920~45년 일제 강점기
1920년대 : 1927년 경성방송국 개국
1930년대 : 1933년 4월 이중방송 실시
1945~48년 미군정기
1950년대 (1948년 독립정부 수립 후~)
1960년대
1970년대: 텔레비전 보도프로그램 정착
1980년대: ‘공적’ 기구화와 양적 확장

4. 통시적으로 본 스포츠 보도
1. 개국 직후 초기의 JODK 단일 채널 방송
2. 1950년대
3. 1960년대
4. 1970년대
5. 1980년대
6. 1990년대

5. 한국 보도방송의 구조적 분석
1. 공영방송 뉴스보도의 형식 및 내용연구
2. 국내 3사 메인뉴스와 BBC와의 뉴스구조 비교
3. TV 뉴스 아이템의 채널 간 중복성
1) 뉴스아이템의 중복률에 미치는 변인
2) 뉴스아이템의 중복성 분석 - 정보채널에 의한 분류
3) 뉴스아이템의 중복성 분석 - 내용적 특성에 의한 분류


본문내용
1. 방송보도란

-방송을 언론기관이라 할 수 있는 근거는 방송매체들이 뉴스를 전달하고 있기 때문이다.
-방송보도는 우리가 직접 경험할 수 없는 세상을 내다보는 창문의 역할을 하고 그것이 담아내는 메시지로서의 뉴스 내용이 곧 우리가 경험하게 되는 세계상이다.
-전파메체의 특성인 속보성, 광범위 전파성 등을 이용하여 사회적인 관심사가 될 만한 일들을 취재, 편집, 전파하여 사회구성원들의 알권리를 충족시키고, 나아가 사회적 쟁점이 되는 사안에 대해서 각계 각 층의 의견을 수렴하여 사회 여론으로 형성하는 일련의 과정이라 할 수 있다. ‘가우리 학문공동체’ 네이버까페
http://cafe.naver.com/gaury/14904




2. 방송보도의 특성 손용 「현대방송이론」
3. 한국방송보도의 역사

1920~45년 일제 강점기 김성호, , 광운대 언론대학원, 2007



1920년대 : 1927년 경성방송국 개국

개국 1차 연도(1927)의 편성 방침에는 ‘오락 방송을 주축으로 하였다.’라는 내용이 있으나, 개국 2차 연도(1928)의 편성 방침에는 ‘보도·오락 방면에 중점을 두었다.’고 한다. 이는 라디오가 처음 소개되었을 때 보도·교양의 기능보다 오락의 기능으로 청취자에게 인식되었기 때문이며, 개국 2차 연도 때는 도쿄방송국의 편성 방침을 따라 보도의 비중을 늘린 것이라 한다. 경성방송국의 개국 당시 3대 사명 즉, 보도, 교화, 위안 등을 내걸었다고 하는데 이때 보도란 내외·선내 뉴스, 천기예보(기상통보), 시장가격, 경제시황 등을 포함한 것이다.

1930년대 : 1933년 4월 이중방송 실시

편성으로 살펴본 보도 프로그램의 비중

경성방송국의 1933년도 편성을 살펴보면 제 1방송(일본어)의 경우, 보도 프로그램(45.4%)이 교양(22.5%)·오락(26.3%) 프로그램보다 많이 편성되었다. 또한 보도 프로그램에 한해, 도쿄 방송을 경성방송에 중계하는 입중계(19.7%)보다 자국편성(67.9%)이 3배 이상이다. 이는 경성방송이 식민지 거주자를 위한 것임을 감안 할 때 당연하다고 볼 수 있으며, 스포츠 중계가 많았기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다.

제 1방송(일본어)프로그램 장르별 방송 시간(분) (1933년 1월~12월)
장르
입증계
자국편성

보도
15,319 (19.7%)
60,305 (67.9%)
75,624 (45.4%)
교양
23,485 (30.1%)
14,095 (15.9%)
37,580 (22.5%)
오락
31,906 (40.9%)
11,930 (13.4%)
43,836 (26.3%)
어린이시간
4,858 (6.2%)
2,452 (2.8%)
7,310 (4.4%)
국제방송
2,394 (3.1%)
·
2,394 (1.4%)

77,962 (100%)
88,782 (100%)
166,744 (100%)

출처 : 일본방송협회, 『라디오 연감』, 1934, p.433 재구성

제 2방송(조선어)프로그램 장르별 방송 시간(분) (1933년 1월~12월)
장르
이중방송 개시 전
이중방송 개시 후

보도
250 (60.5%)
940 (37.6%)
1,190 (40.9%)
교양
73 (17.7%)
399 (16.0%)
472 (16.2%)
오락
69 (16.7%)
1,057 (42.3%)
1,126 (38.7%)
어린이시간
21 (5.1%)
104 (4.1%)
125 (4.2%)

413 (100%)
2,500 (100%)
2,913(100%)



김성호, , 광운대 언론대학원, 2007

반면, 제 2방송(조선어)의 경우는 이중방송 개시 후에 보도 프로그램(60.5%→37.6%)이 크게 줄고 대신 오락프로그램이 2배 이상(16.7%→42.3%) 증가했다. 이후 이러한 변화는 더욱 극명하게 나타난다.

1934년 편성 현황을 살펴보면, 제1방송의 자국편성에서 보도 프로그램이 방송회수는 85%, 시간 량은 70%에 육박했다. 이는 스포츠 중계방송의 활성화를 들 수 있는데, 경마경기나 수상경기까지 방송 영역으로 확대되었기 때문이다. 지방의 산업뉴스가 편성되고 폭풍경보 방송은 일일 3회, 50분 정도까지 할애하기도 했다. 반면 제2방송의 경우 보도 장르보다 위안 프로그램의 비중을 높여갔다. 보도 장르의 방송회수는 전체 방송의 60%가 넘지만 실제 방송 시간 총량에서는 위안 장르가 38.7%로 보도 31.3%보다 높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제1방송의 보도와 위안 프로그램의 편성과 대조를 보인다. 경성방송이 대중적 오락 프로그램을 통해 조선인 가입자를 유인하기 위한 편성정책을 구사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해석된다.

보도 프로그램, 뉴스 방송의 목적

뉴스 방송은 국제정세를 민첩하게 파악해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도구의 역할을 수행한다는 사명감을 띠고 있었다. 제2방송 뉴스방송은 주로 일본어 뉴스를 한국어로 번역한 것이었다.


1945~48년 미군정기

이 시기의 뉴스 포맷과 내용

미군정 시기의 뉴스는 아침 6시 30분, 낮 12시 반, 저녁 4시 반, 7시, 9시의 다섯 차례로 구성되었다. 이는 후에 아침 6시 반이 7시로, 4시 반 뉴스를 5시로 한 정시제로 바뀌었다. 노정팔, 「한국방송과 50년」, 나남출판, 1995, p. 29
뉴스 뒤에는 공지사항 시간이 있었다. 청취자에게 알려야 할 사항 또는 사람을 찾는 소식 등을 전했다. 오후 1시 30분부터는 군정청 기록 뉴스라는 것이 있어 군정청 소식을 기록할 수 있도록 천천히 불러주는 방송을 했다. 아침 뉴스는 외신이 주종이었고, 낮 뉴스는 오전중의 중요한 뉴스와 어제뉴스를 이어주는 속보 등을 다뤘다. 7시에는 그날의 뉴스를 고르게 편집한 종합적 성격이었으며 9시 뉴스는 해설적인 내용이 많았다. 일주일에 한 번씩 뉴스 해설이 있었지만 정치적 중립을 고수해 국내뉴스보다는 주로 국제정세를 많이 다뤘다. 위의 책, p. 39
미군정 시기의 뉴스는 15분 단위의 정시 방송제(쿼터제)로, 이를 통해 방송의 기본 순서를 확립시켰다고 볼 수 있다. 정시방송제는 청취습관의 형성 및 정기적 정보제공이 가능하므로 정시방송제는 뉴스 포맷을 정착시킨 기본 조건이라 할 수 있다. 조항제, 「한국방송의 역사와 전망」, 한울, 2003, p. 163


노정팔, 「한국방송과 50년」, 나남출판, 1995, p. 29
위의 책, p. 39
조항제, 「한국방송의 역사와 전망」, 한울, 2003, p. 163



미군정 시기의 방송 보도 특징 : 방송기자의 등장과 국가기구로서 보도

첫 번째 방송기자의 등장

해방 후 새로운 소식을 전하는 뉴스의 중요성이 부각되었지만 당시 신문은 하나밖에 없었고 종이가 부족해 하루에 타블로이드 4면을 발행하는데 그쳤다. 는 1945년 11월에 복간했고 는 12월에 발행될 수 있었다. 이런 상황이었으므로 보도가 빠르고 하루에 여러 차례에 걸쳐 소식을 전하는 방송뉴스가 인기가 있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때의 방송 뉴스는 동맹통신을 번역해 우리말로 방송하는 것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방송기자가 없었다. 임시방편으로 처음에는 아나운서들을 동원해 취재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체제로는 방송뉴스를 제대로 취재할 수 없어 방송기자제도를 마련하게 된다. 이때 아나운서였던 문제안과 만주신경방송국에서 기자경력을 가지고 있는 조동훈이 해방 후 방송기자 1호가 되었다. 노정팔, p. 28


국가기구로서의 종속성

미군정 시기의 보도 프로그램은 쿼터제 도입, 방송분야 취재기자 활동 등의 선진적 방송 운용체제를 도입했지만, 뉴스의 내용측면에서는 국가기구로서의 종속성을 벗어나지 못했다. 미군정이 뉴스를 사전검열로 정보를 통제했기 때문이다. 1945년 모스크바 3상 회의 결과가 AP 외신으로 들어왔을 때 당시 문제안 기자가 이에 대한 각 저당의 의견을 취재해 기사를 작성했지만 미국인 고문에 의해 차단되어 방송되지 못했다. 이후 미군정은 ‘공지사항 및 보도를 위한 방송규칙’을 발표해 사전검열을 정당화했다. 또한 1947년 ‘방송국 적화음모 사건’이후 강화되었다. 이 사건은 서울 중앙방송국에 침투한 좌익 직원을 잡아들였을 때 미소공동위원회의 소련측 대표의 연설을 방송이 원문과 달리 보도해 물의를 빚으면서 비롯되었는데, 미군정 공보부가 ‘방송보도에 관한 규칙’ 및 ‘방송뉴스의 편집요강’을 제정해 뉴스 내용을 검열했다. 조항제, p. 164~165


1950년대 (1948년 독립정부 수립 후~)

이 시기의 뉴스 포맷과 내용

1950년대의 뉴스는 아침 6시, 낮 12시 30분, 오후 5시, 7시, 9시에 15분 이렇게 하루 다섯 차례에 걸쳐 15분씩 진행되었다.(예외 : 오후 5시는 5분) 54년부터는 오후 1시에 지방과 기록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위해 30분 간 기록 뉴스를 실시하고 55년 10월부터는 뉴스의 배경설명과 사건의 경위, 정세 전망 등을 자세히 보도하기 위해 하루 한 번 을 만들었다. 이는 신문사 주필, 편집국장, 대학교수 등을 초청해 뉴스를 해설했다. 이때 외신을 강화하기 위해 텔레타이프를 자체적으로 설치하고 외신기자를 채용했다. 외신보도가 빨라져 헝가리 반공의거가 일어난 지 불과 2시간도 안 돼 국내에 보도되었다. 56년에는 수원의 970KHZ 제 1방송과 이중방송을 실시하였고 보도프로그램을 다양하게 두었다. 경제면

노정팔, p. 28
조항제, p. 164~165

을 강화해 종전의 외에 , 등이 신설되었고 도 선보였다. , 같은 해외 관련 프로그램도 생겼다. 57년에는 라디오 기술의 발달로 , 등의 녹음 취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