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시] 1930년대 한국 시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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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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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1930년대 시대적 배경

1.1 만주사변
1.1 1930년대의 서울

2. 1930년대 시단의 경향과 주요시인 작품 분석

2.1. 프로 이후의 프로
2.1.1 30년대 프로시론의 전개양상
2.1.2. 30년대 주요 프로시인과 작품, 작품에 대한 기존논의

2.2. 순수서정시 지향과 모더니즘
2.2.1 순수시와 잡지 『시문학』
2.2.2 시문학파 주요시인
2.2.3 모더니즘
2.2.3.1. 이미지즘 시인과 작품
2.2.2.2. 쉬르리얼리즘 시인과 작품

2.3. 생명파
2.3. 그 밖의 경향

3. 학교 교과서에 실린 시들

4. 임용고시 기출문제

본문내용
1. 1930년대 시대적 배경

1.1 만주사변
1929년 세계 대공황의 여파는 일본도 피할 수가 없었다. 경제공황으로 인하여 방직과 군수공업을 중심으로 한 산업구조가 흔들려 방대한 실업자군인이 형성되었고, 인구의 절대 다수인 농민의 생활도 영락해갔다. 이러한 생활의 빈곤화는 일본 국내의 모순을 첨예하게 드러내게 되었는데, 일본은 이에 대한 해결방안을 식민지 확보에서 찾으려 했다.
이들은 서구 열강이 경제공황으로 인한 자국 문제 해결과, 서구 지역으로의 소련의 진출에 대한 견제로 동북아의 정세를 방관하고 있는 사이에 1931년 9월에 '남만주 철도 파괴 사건'을 빌미로 철도와 거류민의 보호라는 미명 아래 그들의 관동군으로 만주를 침략하였다. 1932년 l월에는 상해사변을 유발시키고 3월에는 일본괴뢰정부인 만주국을 세웠다. 만주국의 수립은 중국의 혁명운동이 만주와 조선에 파급되는 것을 막고, 러일전쟁이후에 긴장이 계속되어온 소련과의 관계에서 대소군사기지를 확보하려는 목적을 가진 것 이었다.
또한 만주시장을 독점함으로써 세계대공황으로 인한 자국 내 공황을 극복하기 위한 전략적 기도가 있었던 것이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조선에 대해서는 농촌수탈을 강화하면서, 침략전쟁의 확대 에 따라 군사적 수요와 연관되는 그들의 독점자본을 진출시켜, 군수품공급기지, 군사침략적 기지로서의 성격을 강화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조선사상범 보호관찰령(1936.12), 국가총동원법(1938.4) 으로 전시하의 사상을 철저하게 통제 하였다. 윤충의, 『1930년대 리얼리즘의 형상화 방법』, 인문과학연구, 대신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1994.


1.2 1930년대의 서울
1930년도를 전후한 시대의 서울은 19세기의 파리와 같은 대도시에 비교할 수는 없었으나, 명치유신 이후 급격히 성장한 일제가 실시한 한국 내 시장 확대책의 일환으로 추진한 도시화 정책으로 외형상으로나마 근대도시의 풍모를 갖추고 있었다. 자료에 따르자면 1928년 서울 인구는 약 31만5천이었고 「별건곤」, 1929. 10. 「경성통계」. 인구 구성은 한국인 225,833명, 일본인 84,176명, 외국인 4,997명임. 재인용.
1934년에는 38만2천명에 이르렀다. 「개벽」, 속간호 1호, p.120 참조. 재인용.
1934년 부산-평양-대구-인천-개성 등의 도시도 인구 15만~5만으로 나타난다. 부산 약 15만 6천, 평양 15만, 대구 10만 5천, 인천 7만 2천, 개성 5만 2천명 등으로 되어 있음. 「개벽」, 속간호 1호, p, 120 참조. 재인용.

특히 서울은 북서쪽의 남만주를 잇는 경의선, 북동쪽의 북만주를 잇는 경원선-함경선(1928년 10월 개통)과 남쪽 부산으로 이어지는 경부선 등이 통과하는, 교통과 상업의 중심지로서 한반도 내에서 일제의 가장 큰 시장이었다. 마침 자본주의 전성기, 이른바 국가독점자본주의 확립기를 맞고 있던 일제가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켜 중국내륙 침략을 꾀했던 것도 한반도내에서 확보한 그들의 시장의 안정을 기하기 위한 것이었음은 주지하는 바와 같다.
그들은 일본인 거류지인 서울 남산 밑 충무로-진고개 일대에 대규모 신시가지를 조성, 이곳을 서울의 메인 스트리트로 삼고 각종 대기업-중소기업을 진출시켜 이 지역의 상권을 장악하고있었다. 이곳을 그들의 대자본으로 좌지우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거리에는 2․3층의 건물을 주축으로 하면서 4층 이상의 건물을 새로 지었으며 일본에서 실어온 각종 상품을 진열, 밤이면 화려한 전등불 아래 수많은 인파를 모여들게 하였다. 특히 밤에 “불야성의 별천지”로 변하는 본정통 일대는 “그곳을 들어서면 조선을 떠나 일본에 여행나온 느낌”이 들 정도였다. 당국은 마차를 못 다니게 하여 보행자들로 하여금 마음대로 다니며 상품을 사게 했고, 이 지역으로 가는 교통량을 늘렸다. 한편 청계천 북쪽 종로일대는 한국인들이 상권을 갖고 있었던 지역이었다. (강)남촌만큼 화려하지는 않았으나 2-3층의 건물이 아스팔트 주변에 새로 지어졌고 새로운 상점들이 들어서며 종로 네거리는 차량과 인파로 붐볐다.
이러한 외형적인 도시화는 말할 것도 없이 엄청난 희생과 불균형속에서 타율적으로 감행된 것이었다. 화려함의 이면에는 거리를 헤매는 실업자-신당리의 빈민굴- '경성상인'등의 파산과 전락, 뒷골목의 거지-매음-마약 등 도시화가 가져온 어두운 부산물들의 놓여 있었


2. 1930년대 시단의 경향과 주요시인 작품 분석

2.1. 프로 이후의 프로

2.1.1 30년대 프로시론의 전개양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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