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백제의 무령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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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역사] 백제의 무령왕릉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 목 차 -
1.머리말
2.무령왕릉
- 송산리고분군(宋山里古墳群, 사적 제 13호)
- 세기의 발굴
- 치밀하게 설계된 왕의 무덤
- 무령왕릉의 구조
- 유물 출토 사황
- 훌륭한 인품, 빼어난 외모?
- 무령왕(武寧王)의 생애(生涯)와 치적(治績)
3.맺음말
4.참고 문헌
본문내용
무령왕릉

백제 멸망 후 8백여년이 지난 15 세기의 기록인 [동국여지승람]에 보면 공주의 왕릉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공주에는 두 곳에 왕릉이 있으며, 하나가 시내로부터 서쪽 3리에, 다른 하나가 동쪽 5리 능현(陵峴)에 있다" 고 되어 있다.
이들 기록 중 앞쪽의 "서쪽 3리 지점"에서 1971년 7월에 발견된 것이 바로 무령왕릉이다. 역사적 사건도 때로 '우연한' 작은 계기가 그 실마리가 되는 경우가 있다.
무령왕릉 발견이라는 역사적 사건도 말하자면 그러한 일에 속한다. 왕릉이 발견된 지역에서는 이미 일제 시대에 여러 개의 백제 무덤이 확인되었고, '송산리 고분군'이라는 이름으로 이미 국가의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었다. 이들 무덤 중 특히 주목되는 것은 '6호 무덤'이었다. 6호 무덤은 다른 인근의 무덤과는 그 규모나 형태, 그리고 건축 재료가 크게 달랐기 때문이다. 이 무덤은 정교하게 제작한 무늬 벽돌을 사용하고 지하에 아름다운 아치형 곡선의 건축을 하고 있었다. 거기다 벽면에는 4방으로 4신도의 벽화까지 그리고 있었으며 유감스럽게도 일제 때 유물은 이미 도굴되어 없어진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기록에 의하여도 뒷받침되는 영락없는 백제 왕릉이었다.
오랫동안 송산리 고분군의 관심은 6호 무덤이었다. 1971년 여름에도 장마에 대한 6호 무덤의 보호가 관심이었다. 산 윗 쪽으로부터 내리칠 빗물이 6호 무덤에 영향을 약화시키기 위해서는 주변에 배수시설이 필요하다는 결론이었다. 그 작업이 시작되자 땅 표면 바로 밑에서 곧 무령왕릉의 앞부분 건축부의 윗 모서리가 노출되었다. 그것은 무덤이 만들어지고 난 다음 1천 5백년간 아무도 손을 대지 않은 것이었다. 더욱이 그 안에는 무덤의 주인공이 무령왕 부부라는 사실이 명백히 기록되어 있어 세상 사람들을 크게 흥분 시켰던 것이다.

- 송산리고분군(宋山里古墳群, 사적 제 13호)

충남 공주시 금성동 (옛 지명은 공주읍 송산리)에 위치한 송산리고분군은 무령왕릉을 포함하여 9기가 조사되었으며, 13기 이상의 고분이 분포되어 있었다.
해발 높이 130m의 송산(宋山)을 북쪽의 주산으로 한 구릉의 중턱 남사면에 분포되어 있으며, 계곡을 사이에 두고 서쪽에는 무령왕릉과 5,6호분이 있고 동북쪽에는 1~4호분이 있다. 1~5호분은 할석을 쌓아 만든 궁륭상 횡혈식설실분이며, 6호분과 무령왕릉은 횡혈식의 전축분이다. 석실분은 한성 도읍기부터 채용한 묘제이며, 전축분은 6세기 초 중국 남조 양나라로 부터 이입된 무덤양식이다. 무령왕릉의 발견으로 송산리고분군이 왕릉임이 분명해졌고 공주 일원의 주미리(舟尾里), 교촌리(郊村里), 금학동(金鶴洞), 옥룡동(玉龍洞) 분묘군이 동시기 귀족의 분묘로 추정된다.

- 세기의 발굴

1971년 7월 6일 송산리 5,6호분 배수로 공사 중 우연히 벽돌무덤 1기가 발견되었다. 무덤입구는 벽돌과 회로 빈틈없이 밀봉되어 있었고, 도굴의 피해를 입지 않은 처분이었다. 무덤의 입구에는 왕과 왕비의 지석 2매가 놓여 있었다. 지석에는 백제 무령왕과 왕비가 돌아가셔서 이곳 대묘에 안장했다는 내용이 수려한 남조풍(南朝風) 해서체(楷書體)로 새겨져 있었다. 1442년 간 긴 역사의 흐름속에서 조용히 침묵하였던 무령왕과 왕비가 다시 역사의 전면으로 부각되는 순간이었으며, 백제사와 백제고고학연구가 진일보하게 되는 서막이었다.
구조 능은 산의 경사면 암반층을 굴착하고 벽돌로 널길과 무덤방, 배수구를 만들고 그 위에 직경 20cm의 원형 봉토를 쌓아 만든 무덤이다.
무덤방은 장방형이며 남북 4.2m, 동서2.72m, 높이 3.14m이다. 내부는 남쪽 일부를 제외하고 모두 바닥보다 21cm 높게 만들었다. 네 벽 가운데 남북벽은 아래에서 천장부까지 약간 안으로 경사를 지우며 반듯하게 이르러 차츰 안으로 기울여 터널처럼 만들었다. 벽면의 벽돌을 쌓은 방법은 길이모쌓기와 작은모쌓기를 번갈아 하였는데, 길이모쌓기는 4개의 벽돌을 위어 포갰고, 작은모쌓기는 1개의 벽돌을 세워서 배열하였다. 무덤방을 쌓은 벽돌에는 사격자(斜格子)의 망상문(網狀紋)에 6∼8엽의 연화문, 그리고 인동문(忍冬紋)이 시문되어 있다. 무덤방의 벽면에는 총 5개의 감실(監室)이 설치되어 있다.
참고문헌
참고 문헌

김종일, [이야기 백제왕조사], (청솔출판사)
박영규, [백제왕조실록], (웅진닷컴)
한국생활사박물관 편찬위원회, [한국생활사박물관 4(백제생활관)], (사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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