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사] 갑오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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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근현대사] 갑오개혁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1. 서론
2. 직전의 시대 배경과 개혁
필요성의 대두
3. 신진 세력의 등장
3.1. 김홍집
3.2. 유길준
4. 개혁의 결심과 실행
5. 실패와 갑오개혁의 의의
6. 결론
6.1. 갑오개혁을 성공으로 이끌었을
만한 가정 · 평가
6.2. 조사하며 느낀 점

본문내용
1. 서론
갑오개혁이란, 1894년 7월부터 1896년 2월까지 개화파 내각에 의해 추진된 근대적 제도개혁으로서 갑오경장이라고도 불리며 ‘위로부터의 개혁’의 대표적 주자이다.
19세기 후반 한국의 근대개혁운동은 1894년 갑오개혁으로 정점에 이르렀다. 1894년 1월 초 농민전쟁의 시작에 이어 6월말 청일전쟁이 발발한 가운데 출범한 새로운 개혁정부는 조선국가의 근대적 개혁을 수행했다. 이를 당시에는 ‘대경장大更張’이라고 표현했는데, 이를 빌려와 일반적으로 개설서나 연구서에서 ‘갑오경장甲午更張’이라 했다.
그런데 ‘경장’이라는 말은 조선의 제도와 문물이 해이해져서 현실과 어그러질 때 이를 고쳐서 긴장하게 하는 것으로, 사회적∙정치적으로 부패한 제도를 고쳐 새롭게 하는 일을 말한다. 여기서 경장의 의미는 전통적인 제도의 개혁에 국한되어 있다. 그렇지만 이 사건은 전통적인 봉건국가의 틀 내에서 운영상의 몬순을 제거하려는 것이 아니라 조선왕조국가를 근대국가 체제로 전환시키려는 것이므로 ‘근대개혁(近代改革)’이라는 개념을 담아야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1980년대 후반 이후 ‘갑오개혁甲午改革’이라는 용어를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했다. 왕현종, 『한국근대국가의형성과갑오개혁』,(서울 : 역사비평사), 2003, 23면

갑오개혁은 좁은 의미로는 1894년 6월 말 이후 군국기무처가 개혁을 주도했던 시기를 말한다. 넓은 의미로는 이노우에 주한일본공사가 이후 2차 개혁, 이른바 을미년에 개혁이 진행되었다는 의미에서 을미개혁까지, 나아가 명성왕후 시해사건인 을미사변을 거쳐 1895년 12월 28일 아관파천까지의 시기를 포함한다. 한반도 근대화의 중요한 기점의 하나로 말해지기도 하는 갑오개혁의 직접적 배경은, 안으로는 갑오농민군의 개혁 요구에 있었고, 밖으로는 일본의 이른바 내정개혁 강요에 있었다.
제1차 김홍집 내각, 제2차 박영효 내각, 제 3차 을미개혁으로 총 3차에 걸친 개혁이었다. 갑오개혁은 고위 관료로부터 시작된 내각이라는 점과 결국 일본의 지원으로 이루어진 타율적인 개혁이라는 한계 앞에서 사람들의 지지와 비판이 엇갈리고 있다. 이렇게 많은 논란이 되고 있는 주제를 다루어 보기로 한다.


2. 갑오개혁 직전의 시대 배경과 개혁
영 정조 이후 무너진 왕실과 조정은 세도정치로 인해 폐단의 극을 달리고 있었다. 이후 대원군에 이르러서 개혁을 시도하고자 하는 노력이 있었지만 이는 기존의 정권을 유지하는 것을 전제로 한 것으로서 큰 변화를 일으키진 못하였다. 당시의 개혁으로 등용된 인재들의 비율을 살펴보면 노․소론이 전체의 79% 에 달하고 50대 이상의 연로층이 다수를 차지하는 등 새로운 계층을 등용했다고는 하나 턱없이 부족한 정도였으며 제도개혁의 토대를 마련하지 못하는 등 여전히 그 한계를 여실히 보여 준다. 또한 토지개혁에 있어서도 전면적인 개혁을 추진하지 않았고 농민의 정치참여는 허용하지 않는 등 개혁이라고는 하나 당시의 폐단만을 추스르는데 급급했다. 1860년대부터 통상수교반대 정책이 있었고, 외국의 침략적 움직임을 간파한 위정척사운동이 있었다.
반대로, 이미 1860년대에도 박규수, 유홍기, 오경석 등의 개화 선구자들은 외국의 문물을 적극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후 고종의 친정으로 고종과 민비의 측근세력들이 권력을 장악하게 되면서 과감한 문호개방정책을 추진하게 된다. 하지만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조선은 봉건적 군주국가로서의 사회적 모순을 해결하지 못한 채 서구 열강들의 침략으로 강제로 개항하게 되면서 근대국가로서의 변화는 강요된 방향으로 개편되게 된다.
76년 개항을 이후로 조선사회의 사회 경제체제가 크게 동요된다. 자본주의의 발전과 제산업의 변화를 둘러싸고 벌어진 각 계층 간 이해대립은 단지 경제적 이해해 그치는 것이 아니라 기존 조선왕조국가의 체제기반 자체를 붕괴시킬 정도의 격변을 일으키고 있었다. 외세를 막으려는 위정척사와 외세를 받아들여 이용하자는 개화의 흐름은 1880년 조선 책략이라는 개화지침서가 들어오면서 대대적으로 충돌하였다. 1882년 조미수호조약은 개화의 흐름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이고, 같은 해 임오군란은 외세를 배척하는 움직임이 강하였다. 왕현종, 『한국근대국가의형성과갑오개혁』,(서울 : 역사비평사), 2003, 15~55면


당시 조선의 문호개방은 단지 수교와 통상의 문제가 아닌 외압에 의한 내부적 사회제도의 변화와 국가체제의 개혁, 종래에는 제국주의에 의한 식민지로의 전락을 내포한 ‘강요된 근대체제로의 전화요구’라고 할 수 있겠다. 조일수호조규는 머지않아 조선이 개항하게 될 것을 암시하는데 이는 일본이 이미 서양열강들과 수교를 한 상태이었기 때문이다. 82년부터 이어진 조․미, 조․영, 조․독수호통상조약이 이를 잘 보여준다고 하겠다.
이 상황에서 1884년 일어난 갑신정변은 개화사상에 의한 조선의 개혁이란 과제를 조선 사회 전체에 던진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당시 사방에서 뻗쳐오는 외세의 압력은 조선내부의 모순으로 이어지고 조선은 이를 혁파할 독자적 대응 논리를 하루빨리 구축해야하는 시점이었다. 이에 마음이 앞섰던 개화파들 중 일부가 갑신정변을 일으켰고 이는 실패로
참고문헌
왕현종, 『한국근대국가의형성과갑오개혁』,역사비평사, 2003, 15~55면
이광린 ,『 韓國史講座 - 근대편』, 일조각, 1981
주진오 ,『 甲午改革의 새로운 理解 』,역사비평사, 1994 가을호
“유길준”, 엠파스 사전(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천관우, 『 甲午改革과 近代化』, 思想界, Ⅱ-9, 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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