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교과교재연구] 가사문학관동별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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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국어교과교재연구] 가사문학관동별곡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작가 및 작품소개
1. 송강정철의 생애
2. 정철의 문학세계
3. 작품 선정이유
4. 작품소개
5. 장르분석

Ⅱ. 관동별곡 원문 및 전문풀이

Ⅲ. 작품분석
1. 관동별곡 분석
2. 관동별곡의 문학사적 위치
3. 그 외 다른 가사작품
4. 관동별곡에 대한 평가

Ⅳ. 학습지도안

본문내용
Ⅰ. 작가 및 작품소개

1.송강 정철의 생애
 
정철의 자(字)는 계함(季涵)이며, 호(號)는 송강(松江)이다. 부친 유침(惟침)과 모친 죽산(竹山) 안씨(安氏) 사이에서 4남3녀 중 넷째 아들로 중종31년(1536)에 서울의 장의동에서 태어났다. 그가 10세 되던 해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정순붕, 허자 등이 매형인 계림군 유(瑠)에게 없는 죄를 뒤집어 씌워서 죽이니 화가 정씨일가에게도 미쳐 큰형인 정랑공 자(玆)는 체포되어 매를 맞고 귀양을 가는 도중에 죽었으며, 부친 판관공(判官公) 역시 구금되었다가 겨우 죽음을 면하고 관북 정평으로 귀양을 갔다가 이듬해 연일(延日)로 귀양지를 옮겼다. 이때까지 송강은 생활의 안정을 얻지 못하고 학문을 하지도 못하였다. 부친은 그로부터 5년후(명종6년)에 왕자 탄생의 은사(恩赦)로 석방되어 선친의 산소가 있는 전남 창평 당지산하에 거처하게 되었는데 송강도 부친을 따라 27세(명종17) 문과에 합격할 때까지 여기서 지냈다. 이 때 김윤제(金允悌)의 문하가 되어 성산(星山) 기슭의 송강(松江)가에서 10년 동안 수학할 때 기대승 등 당대의 석학들에게 배우고 이이(李珥)·성혼(成渾) 등과도 교유하였다. 1561년 진사시에, 다음 해 별시문과에 각각 장원, 전적(典籍) 등을 역임하고 1566년 함경도 암행어사를 지낸 뒤 이이와 함께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1578년(선조 11) 장악원정(掌樂院正)으로 기용되고, 곧 이어 승지에 올랐으나 진도(珍島)군수 이수(李銖)의 뇌물사건으로 동인(東人)의 공격을 받아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1580년 강원도 관찰사로 등용, 3년 동안 강원·전라·함경도 관찰사를 지내면서 시작품(詩作品)을 많이 남겼다. 이 때 《관동별곡(關東別曲)》을 지었고, 또 시조 《훈민가(訓民歌)》 16수를 지어 널리 낭송하게 함으로써 백성들의 교화에 힘쓰기도 하였다. 1585년 관직을 떠나 고향에 돌아가 4년 동안 작품 생활을 하였다. 이 때 《사미인곡(思美人曲)》 《속미인곡(續美人曲)》 등 수많은 가사와 단가를 지었다. 1589년 우의정으로 발탁되어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을 다스리게 되자 서인(西人)의 영수로서 철저하게 동인 세력을 추방했고, 다음해 좌의정에 올랐으나 1591년 건저문제(建儲問題)를 제기하여 동인인 영의정 이산해(李山海)와 함께 광해군(光海君)의 책봉을 건의하기로 했다가 이산해의 계략에 빠져 혼자 광해군의 책봉을 건의했다. 이 때 신성군(信城君)을 책봉하려던 왕의 노여움을 사 파직, 진주(晉州)로 유배, 이어 강계(江界)로 이배(移配)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부름을 받아 왕을 의주(義州)까지 호종, 다음 해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얼마 후 동인들의 모함으로 사직하고 강화(江華)의 송정촌(松亭村)에 우거(寓居)하면서 만년을 보냈다. 당대 가사문학의 대가로서 시조의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와 함께 한국 시가사상 쌍벽으로 일컬어진다. 창평(昌平)의 송강서원, 연일군의 오천서원(烏川書院) 별사(別祠)에 배향(配享)되었다. 문집으로 《송강집》 《송강가사》 《송강별추록유사(松江別追錄遺詞)》, 작품으로 시조 70여 수가 전한다.

2. 정철의 문학 세계
 
송강 정철의 문학 세계는 당대의 자연적, 사회적 환경과 사우(師友)의 영향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송강은 을사사화로 말미암아 15세까지는 거의 학문을 배우지 못하고 있다가 16세 되던해 부친의 귀양살이가 풀려, 부친을 따라 선조의 묘소가 있는 호남 창평으로 내려와서 비로소 안정된 생활을 누릴 수 있게 되었으며,  27세 문과에 급제할 때까지 이곳에서 다감한 소년 시절을 보내게 되었다. 성산의 기슭아래 우거진 죽총(竹叢), 송강(松江), 창계(蒼溪)의 기석(奇石), 구렁 위의 누정(樓亭), 이른 봄의 설중매, 겨울이 오면 언제나 볼 수 있는 명봉산 위의 학의 무리, 이러한 자연의 풍경은 그의 뇌리에 깊게 인상지어져 〈식영정 이십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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