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튜 아놀드, 문학과 도그마, 영문학, 기독교] 매튜 아놀드의 『문학과 도그마』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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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매튜 아놀드, 문학과 도그마, 영문학, 기독교] 매튜 아놀드의 『문학과 도그마』 해설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Robert Waite의 서문(Introduction, pp. 3-4)
서문(Preface, pp. 5-29)

서론(Introduction, pp. 31-8)
제 1 장 정해진 종교 (Religion Given, pp. 39-83)
제 2 장 침해하는 미신(Aberglaube Invading, pp. 84-99)
제 3 장 새로 정해진 종교(Religion New Given, pp. 100-124)
제 4 장 예언의 증거(The Proof from Prophecy; pp. 125-132)
제 5 장 기적들의 증거(The Proof from Miracles; pp. 133-160)
제 6 장 신약의 기록(The New Testament Record, pp. 161-89)
제 7 장 예수의 신앙고백(The Testimony of Jesus to Himself, pp. 190-249)
제 8 장 초기의 증거자들(The Early Witnesses, pp. 250-349)
제 9 장 그리스도교의 진정한 위대성(The True Greatness of Christianity, pp. 350-65)
결론 (Conclusion, pp. 366-72)

본문내용
로벗 웨잇은 매튜 아놀드의 시 비평이 영국의 문학비평 수준을 진지하고 거의 공감각적 과학(a serious and almost sympathetic science)의 수준으로 끌어올렸다고 평가했다.



서문(Preface, pp. 5-29)

매튜 아놀드는 우리 모두가 그 시작과 징후를 인식하고 있는 필연적 혁명(an inevitable revolution)이 이미 대다수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넓게 퍼진 상태이면서도 우리가 자라나온 종교에 그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경고했다(5). 그러므로 그는 Vinet의 말을 인용하면서, 그리스도교의 합리적 측면을 앞세우고 권위를 부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10).
그러나 종교의 목적(cause)을 위해서 열망하는 사람들에게 할 수 있는 말은, 사람들이 현재 필요로 하는 것이 교회나 교회 당파들이 제공하는 것과는 아주 다른 성경(the Bible)이라는 점을 알지 못하거나, 또는 이 점을 알고 있으면서도, 교회가 집단적이고 조직적인(corporate) 성격으로 국가와 연계할 것인가 여부에 대해서 강한 전투력을 감수하면서 자신들의 에너지를 소모(消耗)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종교를 다시 개주, 개작(to recast)할 필요가 있다고 아놀드는 지적한다(10). 그것은 마치 우리가 미네랄 워터학이나 광물학을 mineralogy라는 명칭으로 다시 연구를 시작할 필요가 있는 것과 매 한 가지이다.

본 서문의 목적은, 성경을 올바르게 구성할 때 성경에 실질적인 실험적 토대를 주게 되고 이 토대를 줄곧 유지한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목적은 또 다른 목적을 염두에 두지 않고서는 추구할 수 없다. 여러 차례 지적하고 추천하려 노력했던 바와 같이, 문화는 세상에 알려지고 말해진 최상의 것(the best that has been known and said in the world)과 우리 자신을 익숙하게 함이며 그러므로 인간정신의 역사와 우리 자신을 익숙하게 함이다(11-2).
이렇게 되게 된 데에는 성직자들과 신학자들의 결함(fault)이 큰 데, 그들은 여러 세기 동안 사람들에게 성서(聖書)가 완벽(完璧)하고 절대무류(絶對無謬)임을 확신시켰던 사람들이다. 물론 문화의 결핍에 대한 사람들의 결함도 있었다.
To a large extent, this is the fault, not of the people's want of culture, but of the priests and theologians, who for centuries have kept assuring the people that perfect and infallible the Bible is (12).

우리의 기계 신학은 신에 대한 긍정을 광적으로 인가하는데, 그 이유는 우리가 머물고 있는 역사로는 신을 추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성서에 대해서 산재된 표현들을 가지고 문자 그대로 해석할 따름이다. 성서의 신 그리고 성서의 구원을 바라다 볼 수 없는 사람은 점차 그리고 엄청난 규모로 자신들이 기성화(旣成靴; ready made) 되어 있음을 알게 되고, 아주 정확하고 환원적인 차원들에서 자신의 편협한 마음에 적합하게 자신들을 바라보고자 할 것이다.
정신(精神; spirit)의 유연성(柔軟性)이 다소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인간들이 생각하고 자신을 표현하는 방식에 대한 경험으로 보아서는, 이것은 문화라는 터득이 첫 발을 내딛는 최초 단계이다.
He that cannot watch the God of the Bible, and the salvation of the Bible, gradually and on an immense scale discovering themselves and becoming, will insist on seeing them ready made, and in such precise and reduced dimensions as may suit his narrow mind (13).

But to take this very first step, some experience of how men have thought and expressed themselves, and some flexibility of spirit, are necessary; and this is culture (13).

그러므로 우리는 문화에 대한 옛 처방으로 다시 되돌아와서, 세상에 생각되고 알려진 최상의 것(the best that has been thought and known in the world)을 알고자 함이다. 그것은 다른 면에서, 특히 성서와의 관련에서 보았을 때, 독서를 통해서 우리가 읽는 것의 비율과 관계를 평가할 수 있는 힘을 얻는 것으로 판명된다.
And thus we come back to our old remedy of culture,--knowing the best that has been thought and known in the world; which turns out to be, in another shape, and in particular relation to the Bible: getting the power, through reading, to estimate the proportion and relation in what we read (14).

그리스도교가 불신과 수치(discredit)에 이르게 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좋은 목적으로 독서를 하기 위해서 우리는 많은 양을 읽어야 하며, 우리가 읽은 많은 독서량을 이용하지 말고 만족해야만 한다. 그렇지만 우리는 전체 또는 거의 전체를 이용하지 않고서는 결코 만족할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사물의 이치가 그러하다는 의미이다.
많은 독서에 접하고 알아야 할 것은 그가 온전한 자기 자신이 되고 자신의 최상의 자아(his best self)가 있는 곳이 어디인지 아는 것이며, 그곳에서 그는 자신의 권력을 보여주고
참고문헌
서지정보: Matthew Arnold, D.C.L., Literature and Dogma: An Essay Towards a Better Apprehension of the Bible (N.Y.: A. L. Burt Company, Date Unknow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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