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시대] 김유신 장군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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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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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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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 주제 선정동기
- 김유신 장군의 생애 및 업적
- 김유신 장군을 바라보는 현대 시각
- 기타 이야기

본론
- 삼국통일
- 김춘추와 문명왕후
- 김유신과 백마


결론
- 발표자의 견해
본문내용
2. 김유신 장군의 생애 및 업적
삼국통일을 이룩한 신라의 장군으로서 본관은 김해(金海)이다. 아버지는 소판(蘇判)·대량주도독(大梁州都督)을 역임한 서현(舒玄), 어머니는 숙흘종(肅訖宗:葛文王 立宗의 아들)의 딸 만명(萬明)이다. 본래 가야국의 시조 김수로왕(金首露王)의 12대손으로, 증조부는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인 구해왕(仇亥王:仇衡王이라고도 함), 조부는 신주도 행군총관(新州道行軍摠管)을 지낸 명장 무력(武力)이었다. 김춘추와 결혼한 문명왕후(文明王后)가 그의 누이동생이다. 김유신은 609년(진평왕 31) 화랑이 되어 용화향도(龍華香徒)라 불린 낭도(郎徒)를 이끌고 화랑정신을 길렀고, 611년과 이듬해 중악(中嶽)과 인박산(咽薄山)에서 삼국통일을 기원(祈願)하고 무술을 닦은 뒤 국선(國仙)이 되었다.

어린 시절
김유신의 가계는 할아버지 김무력(金武力) 때부터 신라에서 군인으로 벼슬하였는데, 고구려와 백제, 신라가 서로 치열하게 다투는 시기에 태어난 김유신은 609년 15살에 화랑이 되어 화랑도인 용화향도를 이끌고 산천을 주유하며 심신을 수련했다.

낭비성 전투
629년 음력 8월 김유신은 진평왕의 명령을 받고 소판인 아버지와 김춘추의 아버지 파진찬 김용춘을 따라 고구려의 낭비성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1차 접전에서 고구려군에게 크게 패한 신라군은 사기가 꺾인 채 싸울 의지마저 잃고 말았다. 이때 중당당주로 출전한 김유신은 혈혈단신으로 적진으로 뛰어들어 고구려 진영을 누비며 적을 교란시킨 후 순식간에 고구려 장수의 목을 베어 가지고 돌아왔다. 이 모습을 보고 기세가 오른 신라군은 앞으로 진격하여 고구려 군사 5천여 명을 죽이고 1천여 명을 사로잡는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자 성 안에 남아 있던 고구려군은 신라군을 두려워한 나머지 더이상 싸울 의지를 잃고 항복하고 말았다.
그 뒤 김유신은 점차 지위가 높아졌지만 늘 병사들에게 모범을 보이려고 노력했다. 그는 언제나 앞장 서서 적진 속으로 뛰어들었고 추위에 지친 병사들을 위로하기 위해 스스로 옷을 벗고 맨살을 드러내기도 했다. 김유신의 솔선수범에 감명을 받은 병사들은 그의 명령이라면 언제든 목숨을 걸 각오가 되어 있었다.
참고문헌
참고문헌
"http://www.naver.com 우리가 몰랐던 삼국시대 스파이 . 강준식
“화랑세기” 역사를 훔친 첩자 . 김영수
“삼국사기” 두산대백과사전
“삼국유사”
“다시 읽는 여인열전(이덕일/역사평론가)”
“삼국사기” 김부식
“KBS1 역사스페셜 ‘김유신은 왜 천관녀를 버렸나’
"http://www.googl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