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고문논쟁에 대한 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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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금고문논쟁에 대한 소고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0. 들어가며

1. 제1차 금고문논쟁 : 宣帝 연간 石渠閣 논의와 今古文의 校勘

2. 제2차 금고문논쟁 : 哀帝 연간 劉歆과 太常博士의 논쟁

3. 제3차 금고문논쟁 : 光武帝 연간 陳元과 范升의 논쟁


본문내용
今文은 텍스트가 모두 유실되었다고 여겨진 前漢 초기에 대체로 老儒들이 구술한 것을 받아 적는 방법으로 복원되었는데 역(易)은 치천(淄川) 사람 전생(田生), 서(書)는 제남(濟南) 사람 복생(伏生), 시(詩)는 노(魯)의 신배공(申培公)과 제(齊)의 원고생(轅固生)과 연(燕)의 한태부(韓太傅), 예(禮)는 노의 고당생(高堂生), 춘추(春秋)는 제(齊)의 호무생(胡毋生)에 의해『漢書』권88「儒林傳」“漢興, 言易自淄川田生;言書自濟南伏生;言詩, 於魯則申培公, 於齊則轅固生, 燕則韓太傅;言禮, 則魯高堂生;言春秋, 於齊則胡毋生, 於趙則董仲舒.”
구전되고 문헌텍스트로 정착하게 되었다.
古文은 武帝의 治世에 魯나라 共王이 宮室을 확장하며 孔子의 古宅을 건드리다가 그 담장 안에서 얻게 되었는데 모두 古文으로 되어있었다고 한다.『漢書』권30「藝文志」“武帝末, 魯共王壞孔子宅, 欲以廣其宮, 而得古文尚書及禮記、論語、孝經凡數十篇, 皆古字也.”
이후에도 이러한 우연이 아닌 인위적인 명령을 통하여 遺書 및 佚書를 찾아서 上同 “至成帝時, 以書頗散亡, 使謁者陳農求遺書於天下.”
얻고자 부단히 노력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러한 두 가지 방법으로 다시 등장하게 된 유가 경전은 전자와 후자의 차이가 上述하였듯이 현격하였는데『漢書』「藝文志」에서는 “문자가 서로 다른 것이 7백 남짓하고 빠진 글자가 수십 자나 되었다.” 文字異者七百有餘, 脫字數十.
라고 말하는 기사에서 그 실상을 잘 알 수 있다. 통치의 근간으로 작용되어야 할 학술 및 사상의 근거가 되는 經傳『隋書』권30「經籍志」1 “夫經籍也者, 機神之妙旨, 聖哲之能事, 所以經天地, 緯陰陽, 正紀綱, 弘道德, 顯仁足以利物, 藏用足以獨善.”
이 판본에 따라 다르다는 문제가 있다는 것은 발생해서는 안 될 일로서 이러한 사안이 조속히 처리되지 않는다면 前述한 儒學의 목적이 상실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劉向 등의 諸臣에게 今古文의 상호 교정 및 교감을 명하고『漢書』권30「藝文志」“詔光祿大夫劉向校經傳諸子詩賦, 步兵校尉任宏校兵書, 太史令尹咸校數術, 侍醫李柱國校方技. (中略) 會向卒, 哀帝復使向子侍中奉車都尉歆卒父業.”
아울러 宣帝 甘露 연간에 五經의 같고다름[同異]에 대한 비교 및 논의를 石渠閣에서 개최 上同 “甘露中與五經諸儒雜論同異於石渠閣.”
하게 되었던 것으로 이 논의는 초기 經學史에 있어서 중요한 쟁점이 될 今古文論爭의 발단이 되는 것이다.
참고문헌
각주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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