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카스에 관한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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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박카스
●제품
●광고
●마케팅
본문내용
●박카스
국내의약품 생산과 판매 모두 부동의 1위인 동아제약의 '박카스'는 발매초부터 유명인사를 등장시킨 CM송으로 소비자들의 구매욕을 불러일으키며 기적적인 신화를 창출해 냈다.
동아제약은 일제의 조선인말살정치가 한창인 1932년 무렵 한국인으로서는 웬만한 거상이 아니면 자신의 이름을 상호로 내세울 수 없었던 시기에 '강중희상점'이란 상호를 내걸고 위생재료를 취급했던 동호(東湖) 강중희(姜重熙)선생에 의해 창업됐다.
강중희선생은 자신이 '강중희상점'을 열기전 일본인과 동업으로 의약품도매상을 시작한 궁부약방(宮部藥房)으로 상호를 복원시키고 동양제약에서 쌓은 영업경험을 살려 위생재료와 의약품 등을 독자적으로 취급했다. 이때 그의 나이 25세였다.
특히 강중희선생이 한국총판을 따내 판매한 일제 안마고약 '망깅고'는 궁부약방이 굴지의 도매상 반열에 오르는데 큰 밑거름이 되었다.
해방후 강중희선생은 상호를 '넓게 퍼지라'는 동아(東亞)란 이름을 붙여 동아약품공사로 바꾸었으나 얼마안가 밀려드는 구호의약품과 밀수약품으로 도매업을 청산하고 제약업으로 전환했다.
이때 생산한 소화제 '생명수'는 '감기신약' '쾌부' '피부파스타'와 함께 동아약품이 제약회사로 재기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담당했다.
1949년 주식회사로 전환한 동아는 명실상부한 제약회사로서의 기틀을 마련했다. '강중희 상점'으로 약업의 길에 들어선지 만 17년만에 현대적인 제약기업을 탄생시키게 된 것이다.
동아제약은 6.25전란중 부산 피난지에서도 생명수 등의 생산활동을 계속하며 휴전이 가까워지자 완전 파괴된 서울에 올라왔다. 다행이도 중학동에 있었던 사옥은 외상을 입지않아 생산설비를 새로 갖추는데 별다른 어려움이 없었다.
그러던중 동아제약은 1958년 용두동 2,700평의 대지에 항생제 생산공장을 설립했다. 배추밭으로 유명했던 용두동의 황량한 벌판에는 이른 아침부터 승용차의 행렬이 줄을 이었다.
강중희사장은 ICA 1차원조자금중 8만달러를 배정받아 항생물질 소분제제기와 연고충전기 등 기계설비와 항생제원료를 독일과 미국에서 발주해 오일페니실린과 스트렙토마이신 등의 항생제를 본격 생산해냈다.
이듬해 강중희사장의 장남인 강신호씨(현회장)가 독일에서 의학박사학위를 취득하고 돌아와 상무로 취임하면서 동아는 새 전기를 마련해 나갔다.
'박카스-디'는 강신호회장에 의해 개발됐다.
희랍신화에 나오는 주신의 이름을 딴 박카스는 처음 종합강간영양제라는 슬로우건을 내걸고 정제로 생산돼 간질환 환자를 대상으로 61년 첫 발매됐다.
참고문헌
네이버 지식
http://www.dongagreenhand.co.kr/index.j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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