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현대사 -분단부터 통일 독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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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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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전후 독일의 재건과 ‘라인강의 기적’
2. 브란트의 동방정책과 독일 통일
3. 독일에서의 68학생운동
4. 유럽속의 독일; 유럽통합과 독일의 위상
본문내용
Ⅱ. 독일 연방 공화국(서독)의 재건

1. ‘라인강의 기적’

서독의 초대 수상으로 선출된 아데나워(Adenauer, Konrad)는 확고한 지도력을 발휘하여 서방과 협력하는 등 새로운 공화국의 형성기를 확실하게 다졌다. 아데나워는 경제 장관으로 에르하르트(Erhard, Ludwig)를 지명하고 연방 공화국의 경제적, 사회적 발전의 방향을 설정하였다. 에르하르트의 경제 정책은 신속하고 포괄적인 경제 회복을 이룩하여 ‘라인강의 기적’으로 불리는 경제적 성장을 가져왔다. 이미 1948년의 통화 개혁 이후 가격 통제를 폐지함으로써 서독의 시장에는 소비자들의 요구를 충족시킬 물자가 넘쳤으며, 중앙 은행의 자율적 조정에 의한 통화의 안정은 저축과 투자를 촉진시켰다. 그 위에다 마셜 플랜에 의한 대규모의 미국 원조가 국내 자본 형성에 유리하게 작용하였으며, 동방으로부터 유입된 난민은 풍부한 예비 노동력을 제공하였다.
이로써 서독은 협력과 노사 간의 화합, 효율적 관리로 전후 유럽 각국이 직면한 파업에 의한 생산성 저하를 극복할 수 있었다. 특히 1950년에 발발한 한국전쟁은 새로운 경제적 자극제가 되어 경제는 1950∼1954년에 연 8.2%, 1955∼1958년에 연 7.2%의 성장률을 보였다.
경제적 기적은 서독인의 생활에 중요한 변화를 가져왔다. 식량이 풍부해지고 일상용품은 충분하게 제공되었으며, 난민을 위한 가옥이 정부의 자금 지원으로 지어졌다. 노동력을 절약할 수 있는 전자 제품도 생산되기 시작하였으며, 전쟁 전까지 사치품으로 생각되었던 자가용은 대중들이 쉽게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1949∼1977년 사이 자동차 생산은 27배로 증가하였고, 이 기간의 산업 생산은 1937년 전의 독일 생산의 6배를 기록하게 되었다. 이러한 성장의 배경에는 전승국이 낡은 기계를 청산하지 않고 가동시킨 데 비해 서독의 기계 설비는 전쟁 후 새롭게 가동되었던 이유가 있었다.
공산품 수출이 경제 기적의 토대가 되었으며, 정부는 적절한 재정 정책과 저평가된 통화를 통해 수출을 장려했다. 서독은 곧 국제 무역 시장에서 주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으며, 1949년에 유럽경제협력기구(OEEC)에 가입했다. 그 다음해에는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에, 1952년에는 국제통화기금(IMF)에 각각 가입했다. 서독은 1952년이 되자 무역 수지가 균형을 이루었으며 1950년대 말에 서독의 무역 규모는 이미 미국 다음으로 세계 두 번째의 경제 대국으로 성장했고 가장 많은 외화 보유국이 되었다.
이러한 경제 성장은 종전 후 서독의 첫 경제부 장관이었던 루트비히 에르하르트(Erhard, Ludwig)의 ‘사회적 시장 경제(Soziale Marktwirtschaft)’ 정책에 기인하였다. 이 같은 사회적 시장 경제를 통해서 서독의 경제는 시장의 기능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자유의 원칙을 사회적 균형과 결합한 효율적인 질서의 틀을 마련한 것이었다. 특히 사회보장정책과 노동시장의 질서를 중요시 하였고, 지금에 이르기까지 독일의 전반의 경제 정책으로 자리잡고 있다.

2. 콘라드 아데나워 시기의 서독의 정치•외교•군사적 독립

독일연방공화국은 아직 완전한 주권 국가는 아니었다. 1955년까지 하원을 통과한 결의안도 연합국 최고 사령관의 서명을 받아야만 법으로 유효했다. 따라서 아데나워는 외교 정책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였고 서구 열강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자 했다. 다행히 그와 같은 정치 상황은 그의 신념인 친(親)서방 정책과 일치했으므로 아데나워는 별 어려움 없이 업무를 잘 수행할 수 있었다. 또한 친(親)서방 정책에서 나아가 그는 소련과 국교를 맺으면서도 동독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동독과 국교를 가진 나라와는 소련을 제외하고는 국교를 수립하지 않는다는 '할슈타인 원칙(Hallstein Doktrin)'을 고수하였다.
아데나워는 서유럽 국가들과의 결속을 통해 공동체 안으로 들어가는 것만이 동등한 파트너로 대접받을 수 있는 길이라고 확신했다. 이 같은 생각을 가진 아데나워는 프랑스와 베네룩스 3국, 이탈리아와 서독이 함께 ‘유럽석탄철강공동체(EKSG)’를 만들자는 프랑스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아데나워 시기에는 군사적인 면에서도 많은 성과를 이루어 냈다. 1952년, 독일의 본에서 독일 조약이 체결되어 연합국 3개 국과 서독 정부 사이에 점령 조례가 폐지되고 서독의 주권을 승인하는 내용이 조인되었다. 이어 서독의 의회에서 재군비 조항은 비준되었고, 다음 해 국방 관련 입법 권한을 연방에 승인하는 기본법의 개정을 다수의 찬성으로 가결하였다. 1954년 파리 조약의 체결로 서방 연합국은 연방 공화국의 완전한 주권을 승인하였으며, 서독의 정부가 독일인민의 유일한 정통적 대표임을 확인하였다. 따라서 독일에 주둔하고 있던 연합국 병력은 점령군이 아니라 동맹군으로서 주둔하는 의미를 갖게 되었다. 이후 1955년 5월 서독은 대서양 조약 기구(NATO)에 가맹하였다.
아데나워는 프랑스와의 관계 또한 개선하고자 했다. 당시 프랑스의 드 골(de Gaule, Charles) 대통령 또한 서독과의 관계 정상화를 통해 미국에 대한 프랑스의 입지를 강화할 수 있다고 믿었으므로 아데나워의 접근을 몹시 반겼다. 1963년 이루어진 서독과 프랑스의 우호 조약은 아데나워 수상이 이룬 업적 중의 하나로 손꼽힌다. 이 조약은 북대서양조약기구와 유럽경제공동체에 대한 서독의 적극적인 지지 자세를 강조하였다.


Ⅲ. 독일 민주 공화국(동독)의 수립과 공산화

1. 동독의 통제 경제 정책

동독은 국가 출발 시부터 시장 경제를 차단하였으며, 생활필수품 배급은 1958년까지 계속되었다. 중앙 통제 경제는 소련이 경제의 후진성을 극복하기 위해 1930년 때에 채택한 강제적 산업화의 모델이었다. 그런데 소련보다 공업화가 앞선 독일에 이 제도를 그대로 적용한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은 시대착오적 발상이었다. 경제가 발달할수록 다양한 기능과 더 많은 정보를 가진 환경 속에서 자율적으로 기능할 수 있는 경제구조가 필요한데, 이와 같은 중앙에서의 획일적인 경제 통제는 경제의 자율적인 성장보다는 경제의 불모를 가져올 위험이 큰 것이었다.
동독 정부가 초기의 2개 년 계획을 토대로 5개 년 계획을 세움에 따라 소련식 계획 경제를 모방하여 경제 구조의 사회주의화와 계획화가 추진되었다. 1950년 말에는 모든 농가를 농업 생산 협동조합에 가입하게 함으로써 농업의 집단화가 시작되어 국가의 강압 속에서 1960년대에 완성되었다.
1960년대 일인당 생산 지수에서 동독은 사회주의 블록에서는 가장 높은 수치를 기록했다. 또 1964∼1967년에 동독의 국민 소득은 해마다 5%, 산업 생산은 7% 성장했다. 그렇지만 동독의 생활수준은 서독의 그것에 비해서 매우 뒤쳐져 있었다. 1967년 서독의 전 가구 중 47%가 자가용을 가졌으나, 동독은 14%에 불과했다. 1960년 6%에 불과했던 동독 가정의 냉장고 보유율은 1969년에 48%로 크게 증가했으나, 이미 서독은 84%에 육박하고 있었다.
동독의 강압적인 계획 경제와 그로 인한 주민들의 탈출은 동독의 경제에 심각한 타격을 미쳤다. 베를린 장벽을 세운 이후 노동력의 이탈 문제없이, 보다 안정적인 경제 정책을 세울 수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동독의 지도자였던 울브리히트(Ulbricht, Walter)는 서유럽을 따라 잡고자 하이테크 산업을 육성하려는 욕망을 품었다. 그러나 그에 필요한 제반 설비와 전문 인력은 턱없이 부족했다. 또한 그와 같은 미래 산업보다 더욱 시급하게 자금을 필요로 하는 산업 분야가 많았기 때문에 그러한 정책은 빛을 발하지 못하게 되었다.

2. 정치•사회적 분위기

소련 당국과 동독의 공산주의자들이 선포한 1949년의 동독 헌법은 이른바 '인민 민주주의' 이론에 토대를 둔 것이었다. 이러한 이론에 따라 공산당은 사회, 정치적 전반을 지도하였다. ‘인민 민주주의’에서 민주주의는 허울에 불과했다. 중요한 결정들은 모두 당 정치국에 의해서 내려졌다. 그런가 하면 통일사회당(독일사회주의통일당)의 전당 대회에서도 민주적 토론이나 절차를 기대할 수 없었다. 게다가 언론과 출판은 철저하게 감시당했다. 따라서 막대한 수의 감시 요원들이 필요해짐으로써 동독 붕괴 당시 그 요원의 수만 해도 16만 명에 육박했다. 동독 정부는 모든 인민의 행동과 생각을 감시하고자 했던 것이다.


2. 브란트의 동방정책과 독일 통일

Ⅰ. 빌리 브란트의 동방정책 (Ostpolitik)

1. 브란트 정부 이전의 독일 상황과 브란트의 집권

분단 후 서독에는 아데나워가 첫 번째 수상으로 취임했다. 그는 친서방주의 정책을 표방하면서 서독의 부흥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뒤이어 에르하르트, 키징거(Kiesinger, Kurt Georg)가 차례로 수상자리를 역임하였다. 이 시기의 서독은 ‘할슈타인 원칙’을 내세워 동독의 존재를 승인하지 않으려 하였다. 하지만 이 같은 정책은 서독과 동독의 관계만을 악화시킬 뿐이었다. 이런 사회분위기 속에서 빌리 브란트(Brandt, Willy)는 1969년 10월 21일에 서독(연방공화국)의 수상으로 선출되었다.
참고문헌
1. 단행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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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래식, 『이야기 독일사; 게르만 민족에서 독일의 통일까지』, 청아출판사,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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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인터넷 자료
http://de.wikipedia.org
http://www.google.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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