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예술] 남태응의 청죽화사로 본 조선시대 회화론의 변화의 흐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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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예술] 남태응의 청죽화사로 본 조선시대 회화론의 변화의 흐름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I. 들어가면서

II. 조선시대 전후기의 화론의 비교
1.초기,중기의 화론
(1) 잡기, 말예론 vs 시화일률론
(2) 성정론과 천기론
2. 조선후기의 화론
3. 전신론이란?

III. 남태응과
1. 남태응
2. 소개
(1) 의 가치
(2) 의 구성
3. 내용
IV. 남태응의 를 통해 본 후기적 화론과 미술사적 흐름의 변화
1. 남태응의 에 드러나 화론 유홍준, 《화인열전1》 , 역사비평사, 2001
-부제: 천기론과 삼품론에 대하여
(1)천기론
(2)삼품론
(3)뼈(骨)와 살(肉)
(4) 윤두서 의 회화관 과의 비교
1) 회화론 전반에 대한 비교
2) 김명국에 대한 평의 차이
2. 남태응의 를 통해 바라본 미술사의 흐름

V. 나가면서

본문내용

조선 초기의 가장 대표적 화인 중 한 명인 강희안조차 이런 말을 남길 수밖에 없었던 것은, 당시 유학의 ‘도(道)’ 사상이 얼마나 경직되어 있었는지를 반증하는 것이라 하겠다. 이러한 엄격한 유교적 입장, 좀 더 정확하게는 정통 성리학의 입장으로부터 임금조차도 자유롭지 못했으니, 제 아무리 대단한 화인이라 할지라도 결국 어쩔 수 없이 ‘자기부정’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는 것은 자명하다. 요컨대, 조선의 성리학이 건국초기 나라의 기틀을 다지고 안정을 가져오는 데에는 큰 역할을 했지만, 그 적용이 너무나 엄격해 문화적 발전에서는 큰 걸림돌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화론을 개진하려는 시도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소극적으로나마 시화일률 또는 시화일치론의 입장에서 회화의 효용가치를 옹호하면서 화론을 펼치려는 시도들이 나타났다. 시화일률론, 혹은 시화일치론이란, 시(詩)와 화(畵)는 둘다 같은 법도 속에 존재한다는 뜻으로, 상대적으로 천하게 여겨졌던 회화를 시의 경지로 끌어 올릴 수 있는 사상적 기반을 마련해주었다. 성간(1427~56)은 소동파가 왕유의 그림에 대해 한 말을 이어받아, “시는 소리 없는 그림이고, 그림은 소리 없는 시이다.” 라는 말을 남겼다. 즉, ‘화(畵)’를 그보다 훨씬 고매한 장르로 여겨졌던 ‘시(詩)’의 수준으로 끌어올려서 회화의 가치를 찾으려 했던 것인데, 강희안도 이와 관련해 “시화는 일법(一法)이라 여기에서 서로 상위함을 찾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하지만, 이러한 시화일치론은 회화의 가치를 전면적으로 재평가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왜냐하면 시화일치론은 회화 자체에 대한 재평가가 아니라, 시의 가치를 보완해주는 개념으로서의 회화에 대한 평가였기 때문이다.

(2) 성정론과 천기론
앞서 말했듯이 그림을 시화일률의 관점에서 말한다는 것은 객관적 대상을 정밀하게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을 통하여 일어나는 화가의 주관적 감정을 표현하는 것에 더 비중을 두고 있다는 얘기가 된다. 따라서 조선 전기의 화론에서는 외형적 묘사를 통한 사실론은 거의 찾아볼 수 없고, 인간의 서정을 발현하면서 정서를 함양하는 일종의 성정론과 천기론이 지배적인 화론이었다. 철학적인 개념이면서 동시에 문학적인 용어로서의 성정(性情)과 천기(天機)로 그림의 본령을 밝히려는 태도이다.

“무릇 그림이란 반드시 천지의 조화를 궁구하고 음양의 운행을 참작하여 만물의 정과 사리의 변화가 가슴속에 가득한 연후에 붓을 잡고 화폭에 임하면서 정신을 모을 때, 산을 그리고자 하면 산이 보이고, 물을 그리고자 하면 물이 보이며, 무엇이고 하고 싶은 바가 있으면 반드시 그 물체가 보여 붓을 휘둘러 그대로 나타낸다······.” - 신숙주
산을 그리고자 정신을 모으면, 산을 안보더라도 능히 그려낼 수 있다니, 겸재 정선이 신숙주의 위와 같은 말을 들었으면 어땠을까. 결국 이때까지만 해도 조선의 회화는 엄밀한 의미에서 고유의 가치평가를 받지 못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러한 성정론과 천기론은 조선 후기에 이르기까지 거의 변함없이 지배해온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화론이다. 그러다가 17세기 조선 중기에 오면 허목과 같은 지화문사에 의해 비로소 철학과 문하 용어인 성정과 천기라는 개념에 대신하여 화론상의 형신(形神)을 말하게 된다. 허목의 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형체는 유형이나 정신은 무형이다. 유형은 그려도 무형은 그리지 못한다. 유형한 것이 정해지면 무형한 것이 온전해지고, 유형한 것이 쇠하면 무형한 것도 사라지면, 유형한 것[형체]이 다하면 무형한 것[정신]도 떠난다.”

이처럼 철학용어 대신 화론상 전문 용어가 사용되게 된다는 사실은 조선중기에 이르러 회화에 대한 독립된 재평가가 이루어지게 되는 배경이 된다.

2. 조선후기의 화론

조선 후기는 1700년부터 100년 내지 120년의 기간을 지칭한다. 임란, 병란 이후 달라진 정치, 경제, 사회, 사상적 변화가 회화상에 구체적으로 나타난 것은 1700년경 무렵부터였다. 심재는 에서 18세기 회화를 논하는 글머리에 공재 윤두서부터 차츰 문로를 열어서 속된 것을 떨어버리고 세련되고 되었다고 하고 있다. 이러한 것은 1700년 무렵부터 일어난 조선 사회, 문화 전반에 걸친 난숙한 변화의 기류에서 회화상의 신동향은 속화의 등장, 진경상수의 발생, 문인화풍의 유행 등으로 요약된다. 즉 리얼리즘과 사실주의의 시대라고 규정지을 수 있는 여러 가지 변화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시대의 화론은 동양화론의 전통에서 형성된 전신론의 참 가치를 지키는 가운데 사실성을 구현하는 ‘전신론적 사실론’과 종래의 관념적이고 정형적인 창작태도에서 홀연히 벗어나 대상의 참 모습을 박진감 있게 그려내는 ‘사진론적 사실론’으로 대별된다.

3. 전신론이란?

전신론이란 본래 대상에 대한 사실적 묘사보다도 천기 또는 형사를 뛰어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