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사] 당대(唐代)의 호풍(胡風)문화 -복식(服飾)과 화장(化粧)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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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중국사] 당대(唐代)의 호풍(胡風)문화 -복식(服飾)과 화장(化粧)을 중심으로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1. 머리말
2. 당대 복식과 화장 문화 속에 나타난 호풍 문화
1) 호풍(胡風)의 시대적 배경
2) 당대의 복식
(1) 당과 전후(前後)왕조와의 인체미 인식 비교
(2) 초기(初期)의 호풍 복식(618년~657년)
(3) 성기(盛期)의 호풍 복식(658년~755년)
(4) 중․만기(中․晩期)의 호풍 복식(658년~755년)
3) 당대 여성의 화장 문화
(1) 피부 화장
(2) 눈썹 화장
(3) 이마 화장
(4) 볼 화장
(5) 입술 화장
3. 맺음말
본문내용
2) 당대의 복식
(1) 당과 전후(前後)왕조와의 인체미(人體美) 인식 비교
북조에서 수에 이르는 시기에는 전반적으로 인체의 수직적 모습을 강조했다. 수대의 돈황 막고굴(敦煌莫高窟) 벽화 제 62호에 묘사된 공양인(供養人)의 허리선은 극도로 높아져 가슴의 볼륨이 억제되면서 길이감을 부여하여 동감(動感)을 강조하는 동적인 직선미가 두드러진다. 치마의 허리선은 겨드랑이 밑까지 높이 끌어올려 어느 시기보다 높은 허리선을 나타냈고, 상체 부분의 비례는 상당히 짧다.
당대는 중국 역사상 가장 대담하고 개방적인 복식형태가 나타났고, 그 문화의 국제적인 성격으로 이국적 기풍이 다양하게 수용되었다. 정치적으로는 분열의 시기에서 안정기로 접어들면서 유행은 난숙(爛熟)해갔고, 온화하고 풍요로운 가운데 생기가 충만했다. 더욱이 측천무후(則天武后)의 섭정과 위후(韋后), 안락공주(安樂公主) 등 여인들의 중앙집권은 유행에 대한 여인들의 적극적인 관심과 선도역할을 가능하게 했다.
당시 이상미의 기준은 둥글고 토실토실한 얼굴, 발달된 가슴, 묵직한 엉덩이, 풍만한 살과 단단한 골격, 튼튼하면서 다소 살찐 체격 등이 있었다. 또한 세부적으로 맑고 반짝이는 눈, 우아하게 휘어진 눈썹, 붉은 입술과 하얀 치아, 잘 발육된 귀와 긴 코, 옥으로 조각한 듯 손가락, 백설같이 희고 부드러운 살결 등이 해당되었다. 주로 생활이 윤택한 상류계급의 이상적 모델이라 할 수 있다.
풍만한 여체의 노출과는 별도로 현종(玄宗)의 개원(開元)·천보(天寶)시대 개원(開元)·천보(天寶): 당 현종 713년~741년, 741년~756년.
에는 남장이 유행했다. 회화자료에서는 주로 궁녀가 남장한 자료를 많이 볼 수 있다. 이들은 남성과 똑같은 단령(團領) 단령(團領): 깃을 둥글게 만든 관복.
, 복두(幞頭) 복두(幞頭): 관모(冠帽)의 하나로 위가 모지고 뒤쪽의 좌우에 날개가 달려 있다.
를 착용함으로써 초탈하고 멋있는 풍도를 갖추었다. 남장한 궁녀들은 유(襦) 유(襦): 현재 한복에서의 저고리.
, 군(裙) 군(裙): 폭이 넓은 속바지의 일종.
, 반비(半臂) 반비(半臂): 깃과 소매가 없거나 소매가 아주 짧은 겉옷.
, 피백(披帛) 피백(披帛): 숄의 형태로 된 겉옷.
을 두른 여인에 비해 풍만하게 묘사되지도 않았고, 단령은 인체를 은폐하는 모양이었으며, 낮은 허리선에서 혁대를 매고 있어 인체의 곡선은 거의 드러나지 않았다.
성당(盛唐) 이후 복식은 인체를 드러내지 않는 풍성한 형태의 전통양식으로 복귀했다. 전대에 도입된 관능미가 간접적이고 은유적인 형태로 수용되어 풍성한 곡선형태 속에서 원숙하고 부드러우며 조용한 분위기를 연출하였다. 풍만한 인체는 송(宋)대 초기까지도 보이지만, 오대(五代) 이후부터는 풍만하던 인체의 모습이 살이 빠지고 얼굴도 갸름해져 표준적인 체형으로 변모하게 된다. 복식도 성당에 비해 넓은 옷과 큰 소매가 점차적으로 작고 좁아졌다.
하지만 송대에 이르러 보수적 성향을 지니면서 정제된 기풍이 나타났다. 많은 학자들이 단순하고 우아한 자연스러움을 제창하였으며, 지나치게 호화로운 것을 반대하였다. 전통에 대한 복고주의 경향이 짙은 가운데 형태 변화도 그다지 크지 않았다. 노출을 점잖지 못한 것으로 여겨 전대에 노출되었던 가슴과 목은 은폐되었다.

(2) 초기(初期)의 호풍 복식(618년~657년)
① 멱리(冪籬)
중국 여성들은 봉건사회 속에서 소위 ‘웃음을 짓더라도 이를 드러내지 않는다.’, ‘문에 기대어 설 수 없다.’, ‘얼굴을 내밀고 길을 갈 수 없다.’ 라는 번잡하고 불합리한 규율을 받들어야 하는 속박을 줄곧 받아왔다.
당대에는 북방계 이민족과의 혼인정책과 북방 민족만의 특별한 유풍인 기마풍습을 통해 여성의 사회적 지위는 그들의 개인적 능력뿐 만 아니라 사회적 배경을 통해 크게 성장했다. 당대 여성들은 봉건적 신분질서의 정신적 압박과 속박에서 벗어나기 시작했고 자신의 본래의 진실과 미려한 얼굴을 점차 똑똑히 보기 위해 전신을 덮는 멱리(冪籬)로부터 조금씩 짧아지는 유모(烽帽)로 발전됨으로써 사회적 의식의 진보를 가져다주었다.
멱리는 가볍고 얇으며 투명한 항라(亢羅) 항라(亢羅): 명주, 모시, 무명실 등으로 짠 직물의 하나이다. 구멍이 송송 뚫어져 있어 여름 옷감으로 적당하다. 생사로 촘촘하게 짠 것을 당항라, 일정한 배열 규칙에 따라 무늬를 짠 것을 문항라라고 한다.
를 이용하여 만든 폭이 넓은 두건이다. 멱리는 남자들도 쓰던 것이지만 주로 여자들이 외출할 때 방풍, 방한, 폐면(弊面) 등의 목적으로 쓰였다. 북방에서는 모래 바람에 의한 풍사작용을 막는 것과, 멀리 외출할 때 낯선 사람들이 보지 못하도록 하는 역할을 했다.
『구당서(舊唐書)』 『구당서(舊唐書)』: 중국 당나라의 정사(正史)를 기록한 책이다. 618년 당나라 건국으로부터 907년 멸망까지의 역사를 다룬 것으로 이십사사(二十四史)의 하나이다. 본기 20권, 지 30권, 열전 150권을 합쳐 총 200권으로 이루어졌다. 원래의 명칭은 ‘당서’였으나, 송나라 구양수(歐陽修) 등이 편찬한 ‘신당서’와 구분하기 위해 ‘구당서’라고 불렀다. 당나라 말의 전란으로 인하여 편찬되지 못하다가 후진 때 와서야 편찬되었다.
에는 ‘고조(高祖)의 무덕(武德) 시기와 태종의 정관(貞觀) 시기에 궁
참고문헌
- 김소현, 『실크로드의 복식』, 민속원, 2003.
- 김영현, 「고대 동양여성의 복식과 화장문화에 관한 연구 : 당대 여성을 중심으로」, 대 구가톨릭대 디자인대학원, 2002.
- 김용문, 「당대의 복식연구 - 당삼채 인물용을 중심으로 -」, 한복문화학회, 1999.
- 신지연, 「신라와 당나라의 두발 양태와 장식 비교 연구」, 한남대 사회문화 과학대학 원, 2004.- 이애련, 「당대 호풍화장문화에 관한 연구」, 동아대 대학원, 2004.
- 황선순, 「중국 화장문화를 통해 본 현대 중국여성의 색조화장 행동」, 서울여대 대학원,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