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고대사] 가야의 대외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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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1 후기가야의 성립과 발전
전기 가야연맹의 해체 이후 5세기 전반부터 한반도의 정세는 급변하게 되는데 고구려는 적극적인 남하정책으로 백제의 수요인 한성을 함락시키고 백제는 부득이하게 웅진으로 천도하고, 신라는 그 기회를 틈타 추풍령을 넘어 보은의 三年山城까지 진출하는 등 국제관계가 크게 동요하게 된다. 이에 위기의식을 느낀 옛 가야지역의 소국들 사이에 재결속의지 기운이 일게 되었을 것이다. 특히 서부경상내륙의 고령, 거창, 산청, 함양, 남원 등의 세력이 최상의 농업입지조건과 철산지를 개발을 바탕으로 하여 급속히 발전하였다. 고령 지산동고분군, 거창 말흘리 고분군, 남원 울산리 고분군, 함양 상백리․백천리 고분군, 산청 중춘리고분, 김해 예안리 고분군 등이 後期伽倻聯盟의 대표적 유적이라 할 수 있다. 이 유적들은 거의 모두 細長形평면의 수혈식석곽묘이며 적석 목관분 등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 출토유물 중에서도 유개고배․기대․장경호의 기형 특징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신라와의 연관성이 일단 배제된 가야 특유의 독자성을 발견할 수 있다. 특히 재통합을 주도하던 세력은 고령 지산리 고분군을 축조하던 집단이 아니었을까 한다. 이들은 전기가야여맹의 聯盟長이던 금관국 수로왕과의 시조 대부터 형제관계를 자칭한 것으로 보아 스스로 그 맹주가 되어 주변 세력들을 통합하고 주변의 옛가야연맹의 소속국들에게는 하나의 정신적 활력소로서의 명분을 제시하여 그 복구에 참여토록 유도한 것이다. 고령세력이 가야의 옛 이름을 따서 대가야라는 국호를 사용한 이유도 옛 가야연맹으로서의 동질감을 고취시키고자 하는 배려를 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다만 예전의 맹주로써 한 시대를 풍미하던 김해세력은 이미 약화되어 상하연맹의 실익이 없고 한 소국으로서 따르게 하여야 할 것이나, 아직 고령 대가야에게는 그런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김해세력에게 형제관계의 명분을 남겨 주어야 한 듯하다. 그러고 정통성을 계승하며 그들의 우월성을 강조하기 위한 방법이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