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상사] 고려 후기의 천태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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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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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천태종의 성립과 무신정권과 불교계의 관계
-천태사상의 전래와 의천(義天, 1055-1101)
-무신정권과 불교계의 관계
2.백련결사(白蓮結社)와 원묘국사(圓妙國師) 요세(了世)
-지눌의 정혜결사
-천태로의 복귀와 백련결사
-법화삼매(法華三昧)
-구생정토(求生淨土)
-백련결사의 기반
3.천인(天因)과 천책(天頙)의 백련결사
-천인
-천인의 법화참법의 전개
-천책
-천책의 사상
4.원간섭기, 묘련사(妙蓮寺)의 건립
-초기의 묘련사
-의선(義旋)의 등장과 백련결사의 변질
5.운묵(雲默) 무기(無寄)
-말법관과 불교비판
-회통론을 통한 불교 통합
-영향과 운묵의 입적 후 천태종
6.고려말, 조선초 천태종의 3파
-법사종의 조선건국 참여와 천태종의 쇠퇴

본문내용
-무신정권과 불교계의 관계
무신정권과 기득권을 누렸던 교종 쪽의 불교사원은 서로 좋은 관계를 유지하지 못했다. 불교 쪽에서는 무인들을 정권의 쟁탈자로 보았고, 그에 따라 직접 무인정권에 싸우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무인들의 갈등에 참여하기도 하고, 왕과 귀족들이 왕권회복을 시도할 때 힘을 빌리는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이렇게 사원이 무신정권에 대항 투쟁한 것은 최충헌의 집권초기에까지 이르렀다. 당시에는 무인권력에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세력이 사원이었다. 따라서 최충헌은 왕실과 문벌귀족과 연결된 불교세력을 제거하려고 시도했다. 최충헌은 교종과 구분없이 정치적으로 반대하는 세력을 제거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최충헌이 권력을 잡은 기간 동안에 큰 피해를 입은 쪽은 왕실과 귀족과 연결되어 있었던 교종 쪽이었다. 이들은 정치에 간여하는 것에 대해 탄압을 받았고, 그 후원세력이 몰락함에 따라 힘을 잃게 되었고, 귀족들의 경제적 이익을 우선시해서 지었던 사찰인 원당(願堂)을 없애는 조치는 교종 쪽 사찰의 경제력을 크게 줄이는 역할을 하였다. 이에 불만을 가진 불교세력이 대립하고 투쟁했지만 결국 최충헌에게 제압당하고 말았다.
최충헌은 자신에게 대항하는 세력이 주로 교종 쪽의 승려들을 중심으로 한 무리라고 판단하고, 자신에게 반대하는 불교세력의 힘을 빼기 위해, 그 동안 불교계에서 비주류이고, 정치와 관련이 적었던 선종 족에 눈을 돌리게 된다. 이때 최충헌이 지원한 인물은 정각국사 지겸(志謙, 1145~1229)과 원진국사 승형(承逈, 1171~1221)이었다. 최충헌에 이어 최우가 고종 6년(1210)에 권력을 잡았는데, 그는 문인들을 많이 기용하여 자신의 권력기반을 넓히려고 하였고, 아울러 불교계에서도 자신의 지지세력을 더욱 키우려고 하였다. 그래서 최충헌이 자신과 반대되는 불교세력을 과감하게 제거하는 데 힘을 썼다면, 최우는 정책을 바꾸어서 포섭정책을 구사하여 폭넓은 지지기반을 세우려고 하였다. 예로 최우는 권력을 잡기 전부터 관계를 맺어오던 수선사를 계속 지원하고, 최충헌이 집권하던 시절에는 적대관계에 놓였던 화엄종과 법상종의 사찰에도 지원을 하였다. 최우는 고종 8년(1221)에 법상종 사찰인 해안사(海安寺)에 은사향완(銀絲香垸) 100좌(座)를 보시하였고, 고종 10년(1223)에는 화엄종의 사찰 흥왕사(興王寺)에 황금 200근으로 만든 13층의 탑과 화병(花甁)을 기증하였다. 하지만 최우는 이 정도에서 멈추지 않고, 불교계의 틀을 다시 짜는 쪽으로 더 진전 시키고자 하였다. 고종17년에는 각도에서 사찰이 세워진 시기와 사찰의 현재 실태를 조사하여 기록에 남기게 했는데 이것은 불교계를 다시 짜기 위한 준비작업이었다. 그러나 고종 19년에 강화도로 수도를 옮기면서 이런 작업은 중단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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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욱, 「고려시대의 불교사상」, 혜안,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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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옥, 「고려시대의 불교사상」, 혜안,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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