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의 유녀(遊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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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조선시대의 유녀(遊女)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1. 서론

2. 본론

3. 결론

본문내용
2. 본론
조선왕조실록 중 태조 6년에 처음으로 유녀에 대한 기록이 보이는데 벼슬아치들이 밤에 유녀를 모아서 놀았다는 내용이다 ≪조선왕조실록≫ 태조6년(1397년) 4월 12일
. 세종 9년의 기록을 보면 제주에서 계집종과 양민 집 딸의 음란한 행동으로 장사치의 재리(財利) 재물과 이익
을 취하여 그 배필을 문란하게 하므로, 이런 음란한 풍속을 금하기 위해 관청 장부에 따로 유녀라고 입적시켜 관비와 같이 부렸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유녀로 하여금 음란한 행동을 거리낌 없이 하게하고, 다른 친구들을 꾀어내 유녀가 되게 하기도 하였다. 유녀로 분류하는 기준 역시 명확치 않아 남에게 미움을 사서 모함을 받거나 아님 소문만으로도 유녀라 하니 막는 효과보다는 오히려 그 폐단이 심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유녀의 장부와 유녀라고 일컫는 것 자체를 금지시켰다. ≪조선왕조실록≫ 세종9년(1427년) 6월 10일

실록에 의하면 유녀의 신분은 양민이나 천민으로 보이며, 천민 중에서도 관비(官婢)보다는 사비(私婢)가 많았던 것 같다 ≪조선왕조실록≫ 세종9년(1427년) 6월 10일, 성종 3년(1472년) 7월 10일, 성종 18년(1487년) 1월 5일.
. 이들은 돈을 받고 몸을 팔았으며 특정 지역에서만 나타났던 이들의 성종 3년에 전국적으로 많이 분포 되어 있다는 기록이 있다. 이들은 계절별로 어량(魚梁) 물을 한군데로만 흐르도록 막고, 그곳에 통발을 놓아 고기를 잡는 장치
의 세금을 거두는 장소와 산간의 승사(僧舍) 중들이 불상을 모셔 놓고 불도(佛道)을 닦으며 교법을 펴는 곳.
로 옮겨 다니면서 음란한 짓을 하였다고 한다. ≪조선왕조실록≫ 성종 3년(1472년) 7월 10일
성종 18년의 기록을 보면 양인 여자와 천인 여자들이 천안지역의 서원 등에 임시로 거처하면서 나그네에게 공공연히 음란한 행동을 한다고 하였다. ≪조선왕조실록≫성종18년(1487년) “양인(良人)과 천인(賤人)의 여자들이 직산(稷山)의 홍경원(弘慶院)등지의 원우(院宇)에 돌아다니다가 우거하면서 행려(行旅)에게 선음(宣淫)하며 생활하는데, 세속(世俗)에서 유녀라고 부릅니다. 이는 마땅히 엄하게 금해야 합니다.”
이런 기록들을 통해 유녀들의 일정한 거처 없이 떠돌아다니면서 매음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유녀들은 범간율(犯奸律) 간통(奸通)을 범한 죄를 다스리는 율.≪대명률(大明律>≫ 형류(刑律) 범간조(犯奸條)에 보면, “무릇 화간(和姦)은 장 80이고, 남편이 있으면 장 90대고, 조간(勺姦:여자를 꾀어서 간통함)은 장 1백 대이고, 강간(强姦)한 자는 교형(絞刑)에 처한다.
에 의해 처벌을 받았는데, 양인 신분인 여성은 노비가 되게 하고, 사비(私婢)는 벌을 받은 다음 주인에게 돌려 보내줬다. 그러나 주인이 알면서도 재물을 취하기 위해 사비로 하여금 매음을 시키는 경우에는 주인 역시 처벌 받았고, 사비는 관비(官婢)가 되었다. ≪조선왕조실록≫ 성종 3년(1472년) 7월 10일, 성종3년(1472년) 8월 14일.

중종 8년 10월의 기록을 보면 유녀의 신분에 따라 벌을 달리 하던 것을 양인과 천인의 구분 없이 형벌을 같게 하였다 ≪조선왕조실록≫ 중종 8년(1513년) 10월 3일 ‘......양가의 자녀와 중은 율문(律文)에 따라 1등을 더해서 죄를 결단한 뒤에 노비로 정하므로 그 벌이 장(杖) 1백, 유(流) 3천 리와 맞먹고, 공·사천(公私賤)은 단지 장 1백으로만 논단(論斷)하여, 죄는 같은데도 형벌이 달라서, 죄악이 징계되지 않습니다. 비록 공·사천일지라도 모두 장 1백, 유 3천 리와 맞먹는 것으로 논단하여야 합니다......후략.’
. 성종 때에 비해 처벌 기준이 강화 된 것으로 보아 사회적으로 풍속이 문란해지고 유녀의 수가 늘어났던 것 같다.
유녀와 간통한 자에 대한 처벌은 향촌사회의 자치 규약인 향약에서 나타나는데 조선후기문신․학자 이병성의 시문집인 ≪순암집(順菴潗)≫ 중 순암선생문집 제15권 잡저(雜著) 광주부 경안면 2리 동약(廣州府慶安面二里洞約)
, 다섯 등급의 벌 중 차중벌 상벌(上罰)은 태(笞) 30이고, 차상벌(次上罰)은 태 25이고, 중벌(中罰)은 태 20이고, 차중벌(次中罰)은 태 15이고, 하벌(下罰)은 태 10이다.
에 해당되었다. 남의 아내나 딸을 간통하면 상벌을 받고, 화간(和奸) 부부가 아닌 남녀가 서로 눈이 맞아 간음함.
한 경우에는 여자도 같은 죄를 받았고, 남의 아내나 딸을 강간한 경우에도 상벌을 받았으며 더구나 관에다 고발하기까지 하였는데, 유녀와 간통한 경우에 한해서는 처벌이 낮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유녀가 원래 직업적으로 매춘을 하던 여성이기 때문에 일반 여성들하고는 차이를 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중종 33년 5월의 기록을 보면 음녀(淫女)에 대한 서울과 지방의 법이 달랐다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지방의 음녀(淫女)들이 발각될 경우 으레 역비(驛婢) 역참에 딸린 계집종.
로 삼았으나 서울에는 이러한 법이 없었다고 한다. 지방에서 매음을 금지하자 지방의 한 관리는 공무를 핑계 삼아 간음(姦淫)을 하려고 서울로 올라왔는데 살인 사건에 휘말려 죽게 되는 일이 발생한다. ≪조선왕조실록≫ 증종33년(1538년) 6월 13일
정원이 아뢰기를,“동부(東部) 참봉 이경종(李敬宗)이 와서 말하기를 ‘간밤에 본부 창선방(彰善坊) 3리 판교(板橋) 근처에 어떤 사람이 목이 잘려 죽어 있기에 곧바로 한성부에 보고하였습니다. 이제 검험(檢驗)하려 합니다. 일이 하도 놀랍기 때문에 와서 아룁니다.’ 하였습니다. 죽은 사람의 옷소매 속에 《대학(大學)》이 들어 있었고 책 속에는 소지(所志)가 끼여 있었는데, 임피현(臨陂縣) 정병(正兵) 이응(李膺)이라고 쓰여 있었고 그 사연은 장례원(掌隸院)이 입송(立訟)한 일로서 외방 사람의 가동(家僮)을 가둬 놓고 출두를 독촉하는 것을 민망스러워 하는 일이었습니다. 경주인(京主人)을 불러서 물으니 임피현 정병 이응이라 하였고, 무슨 일로 왔는가를 물으니 송사(訟事) 때문에 왔다고 하였습니다. 경주인의 집은 남장문(南墻門) 밖에 있습니다.”....후략.

그러자 조정에서는 법을 시행할 때 서울과 지방의 차이를 두지 말고 서울에서 음녀(淫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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