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보의 산문문학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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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이규보의 산문문학 연구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1. 서론

1) 선행연구

2) 작가

2. 본론

1) 記의 개념

2) 작품 분석

3. 결론

본문내용
1191년 8월 부친상을 당하자 천마산에 寓居하며 白雲居士라 자칭하였고 「백운거사어록」과 「백운거사전」을 저술하여 자신의 행지를 차례로 이야기 하였다. 26세에 그의 문학에서 가장 가치를 부여하는 「동명왕편」을 지었다.
그는 그를 천거하는 사람들에 의해 벼슬길에 오를 뻔하였으나 그와 사사로운 감정이 있는 사람이 剳子를 빼앗아 잃어버렸다고 핑계하는 바람에 그는 32세에야 전주목사록으로 보임하여 전주로 부임하였다. 그러나 이듬 해 그를 모함한 사람으로 인해 파직을 당하게 되었다.
1202년 그의 나이 35세 때 동경의 叛徒가 운문산적당과 군사를 일으키므로 조정에서 삼군을 내어 정벌하게 되었을 때 修製員으로 충당하고자 하나 모두 꾀로 회피하자 그는 개연한 모습으로 “내가 나약하고 겁이 많은 자이긴 하나 역시 한 국민인데 국난을 회피하면 대장부가 아니다”하고 종군하였다. 1년 후, 군사들이 개선하고 서울로 돌아왔을 때 다른 이들은 상을 많이 받았으나 그는 참예하지 못하였다.
그의 나이 39세에 「上崔相國書」를 지어 벼슬을 구하였고, 40세에 직한림원에 권보되었다. 그러나 그는 문을 닫고 들어앉아 출입을 하지 않았으니, 해마다 사관․한원․국학 등에서 유관들이 인물을 추천할 때면 늘 그를 우두머리로 삼았고 좌우에서도 그를 칭찬하는 이가 많았다. 최충헌도 그를 등용할 생각은 있었으나 계제가 없음을 서운해하였는데, 그가 모정을 짓고 이인로․이원로․이윤보․이규보에게 명하여 기문을 지으라 하였는데 이규보가 첫째로 뽑히자 현판에 새겨 모정 벽에 걸어놓았다. 이 해 12월에야 관직을 맡게 되었다. 그는 다음해 6월에 권보가 풀리고 직한림이 되었고 을해년(1215) 여름, 최충헌에게 시를 올려 參職階에 제수되기를 구하여 右正言知制誥를 내려주어 좌우사간을 역임하게 되었다.
고종 6년(1219) 팔관회 일로 말미암아 최충헌의 탄핵을 받고 계양 도호부 부사로 좌천되었다. 이 해에 최충헌이 죽고 다음해 예부낭중으로 부름을 받았으나 고종 17년(1230) 63세 때 팔관회에 侍宴의 차례가 舊例에 어긋났다하여 11월에 위도로 유배되었다.
고종 19년(1232) 4월에 보문각학사로 기용되었는데, 몽고가 국경을 넘어 병란을 일으킬 때에 그는 사명의 일을 도맡아 書․表 등을 지어 몽고왕이 감탄하여 병사를 거두기도 했다.
다음해 6월 樞密院副使右敬騎常侍寶文閣學士에, 12월에 상부의 知門下省事戶部尙書集賢殿太學士判禮部事를 맡아보았다. 을미년(1235, 68세) 10월에 表를 올려 물러날 뜻을 보이자 고종은 守太保門下侍郞平章事修文殿太學士監修國史判禮部事翰林院事太子太保로 치사하게 되었다.
벼슬에서 물러난 후 그는 평생에 즐겼던 시와 술로 낙을 삼아 지냈으며 고종 28년(1241) 7월에 崔怡가 그의 시들을 모아 판각하게 되었으나 완성된 것을 보지 못한 채 1241년 9월 2일 74세로 운명을 다하였다.

2. 본론

1) 記의 개념

‘記’라는 문체는 기사, 지, 또는 술이라고도 하는 것으로 어떤 사물을 객관적으로 서술한 것이다. 이 문체는 원칙적으로 작가의 이론이 섞여 있지 않아야 한다고 하지만 중국에서도 송대 이후에는 오히려 작가의 이론이 들어 있는 소위 변체의 ‘기’가 많이 유행했었다고 한다. 장덕순, 『한국수필문학사』, 새문사, 1985, 30쪽.

한편 유협은 『文心雕龍』 유협, 『문심조룡』이민수 역, 을유문화사, 1984, 170쪽.
‘書記’ 章에서 서간문을 중심으로 여러 가지 실용문에 대하여 논하고 있는데, ‘記’에 대한 언급은 다음과 같다.

‘記’란 ‘뜻’을 말하는 것이니 자기의 뜻을 진언하는 것이며, ‘牋’이란 ‘表’다. 곧 그 심정을 표현하는 것이다.
원래 牋이나 記의 법식은 위로는 ‘表’를 엿보고 아래로는 ‘書’를 내려다보는 위치에 있어, 공경하되 두려워하지 않으며, 간략하되 오만에 흐르지 않고, 맑고
참고문헌

-단행본-
국역 『동국이상국집Ⅰ~Ⅵ』, 민족문화추진위원회, 1978.
장덕순, 『한국수필문학사』, 새문사, 1985.
유협, 『문심조룡』이민수 역, 을유문화사,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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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룡, 「이규보론」, 『한국문학작가론』, 형설출판사,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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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영, 「이규보와 」, 『이규보연구』, 새문사, 1986.
장덕순, 「영웅서사시 」, 『이규보연구』, 새문사,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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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수, 『이규보 시문학연구』, 아세아문화사, 1986.
전형대, 「이규보의 한시」, 『이규보 연구』, 새문사, 1986.
김경수, 「이규보의 전에 대하여」, 『이규보 연구』, 새문사, 1986.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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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규, 「이규부의 영물시 연구」, 『진단학보』83, 1997.
박혜숙, 「고려후기 전의 전개와 사대부의식」, 『관악어문연구』11, 서울대 국문과,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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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일남, 「의 수필적 특성」, 『고전산문연구』1, 태학사, 1998.
이상익, 「려조산문학소고」, 『국어교육』18~20합병호, 한국국어교육연구회, 1972.
김성기, 「제례문의 성격과 구조」, 『우전신호열선생고희기념논총』, 창작과비평사, 1983.
김정인, 「이규보의 기 연구」, 이화여대 석사 논문, 1989.
김진수, 「이규보의 산문문학연구」, 경기대 석사 논문, 1990.
남현희, 「고려후기 산수유기 연구」, 성균관대 박사 논문, 1997.
송병렬, 「이규보 문학세계에 있어서 희작적 경향」, 성균관대 석사 논문, 1987.
「의인체 산문의 발달 양상」, 성균관대 박사 논문, 1997.
신용호, 『이규보연구』- 의식세계와 문학론을 중심으로-, 고려대학교 박사논문,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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