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관가야에서 대가야로 중심 이동의 요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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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금관가야에서 대가야로 중심 이동의 요인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1. 머리말

2. 남해안 대전

3. 고령지방 발전의 내적 요인

4. 고구려․백제․신라와 대가야의 관계

5. 맺음말

※ 참고문헌

본문내용
2. 남해안 대전
가야는 초기부터 신라를 상대로 활발한 군사 활동을 벌였다. 《삼국유사》에는 김수로왕(金首露王)과 석탈해(昔脫解) 집단 사이의 분쟁에 대한 간접묘사로 두 사람이 도술 대결을 펼쳤다는 이야기가 나타나있다. 수로왕에게 패한 석탈해가 신라의 임금으로 즉위하면서 양국의 사이는 극도로 나빠졌다. 두 나라는 파사이사금 때 휴전을 하기 전까지 일전일퇴의 공방정을 벌였다. 가야는 42년 건국 후 약 35년 뒤인 77에 신라를 침공했고, 그로부터 17년 뒤인 94년에는 마두성에서 신라와 전투를 벌였으며, 96년의 전투에서는 신라의 장군을 죽이는 큰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
이후 가야는 막대한 철 생산력을 바탕으로 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했고, 철 자원을 통해 신라를 압도하는 우수한 군사력을 가지게 되었다. 399년 가야는 왜(倭)에게 철을 제공해주는 대가로 왜의 병력을 요구했는데 세계 전쟁사를 살펴보면 무역으로 성장한 상인국가들은 대개 상비군의 유지보다는 외교술과 용병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다. 무역에 의존하여 부를 축적한 국가들은 대개 그 세력에 비하여 중앙 권력이 약하고 인구가 적기 때문이다. 카르타고, 베네치아 등이 그 예이다.
그 이유는 신라를 토벌하기 위해서였다. 가야와 왜 연합군은 태화강구에서 합류하여 태화강 옆의 동천을 따라 금성으로 향했다. 금성으로 가던 연합군은 평균 폭이 20m 밖에 되지 않는 남천에서 신라의 군대를 맞게 되었다. 신라의 내물(奈勿) 마립간은 고구려에게 원군을 요청한다. 원군이 오는 시간을 벌기위해서 신라 군대는 전투를 감행하나, 남천에서 가야·왜 연합군에게 대패(大敗)하게 되고, 고구려 원군이 오기 전에 경주 중심부까지 점령당하게 되었다. 당시에는 아직 나성이 개발되지 않았기 때문에 신라의 도성은 거주지역을 성벽으로 둘러싼 형태가 아니라 사방으로 개방되어 있었다. 이에 연합군이 성들을 손쉽게 점령할 수 있었다.
내물 마립간은 월성에 들어가 겨우 목숨만 부지하고 있었다. 금성을 장악한 후, 연합군은 치명적인 실수를 하게 되는데, 그것은 연합군이 금성만 장악하였을 뿐, 신라를 멸망시킨 것은 아닌 상황에서 가야는 전쟁이 끝나지도 않은 상황에서 왜군들이 금성에서 전리품들을 약탈하도록 허락을 한 것이다. 광개토대왕비에는 당시에 상황을 “영락 10년에 왕이 보병과 기병 5만을 내어 신라를 구원하게 하였다. 남거성을 거쳐 신라성에 이르니 그곳엔 왜적이 가득하였다.” 라고 전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고구려 군이 도착하였고, 고구려군은 연합군이 해이해진 틈을 타 공격을 하였다. 결과는 고구려군의 대승으로 끝나게 되었다. 이 전쟁으로 금관가야는 멸망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공식적인 금관가야의 멸망은 552년이지만 정예 군사를 비롯하여 무장 병력을 거의 잃었고, 금관가야의 무역중심지인 현 부산지역에 해당하는 영토를 빼앗김으로써 가야연맹을 주도할 힘을 잃게 되었다. 이에 금관가야가 보유하고 있었던 가야연맹의 주도권이 고령지방의 대가야로 넘어가게 된 것이다. 이 시기에 이르러 낙동강이 신라와 가야의 경계를 이루게 되었고, 수로교통의 기능을 상실하게 된다. 따라서 김해의 금관가야는 쇠퇴할 수 밖에 없었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고고학적 자료를 살펴보면, 금관가야 주도의 전기 가야연맹의 해체 이후 5세기 가야지역의 유적 상황이 4세기 이전에 비하여 상당한 변화를 보이는 것을 알 수 있다. 원래 김해를 중심으로 한 경남 해안지대에서는 패총 및 대형 목곽분 등이 다량 출토되었으나, 5세기에 들어오면서 갑자기 고분유적의 수효가 줄어들고 규모도 소형 석곽분 정도로 위축되게 된다. 이러한 현상으로 미루어 볼 때, 이 지역에서 번성하였던 전기 가야연맹의 소멸이 단적으로 드러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참고문헌
국사편찬위원회,『한국사』7, 탐구당, 1996.
김성남, 『전쟁으로 보는 한국사』, 수막새, 2005.
한영우, 『다시찾는 우리역사』, 경세원, 19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