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대한제국의 개혁정책 -내재적 발전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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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사] 대한제국의 개혁정책 -내재적 발전론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Ⅰ. 들어가며

Ⅱ. 내재적 발전론 측면에서 ‘고종은 개명군주였다’는 명제에 대한 논증

1. 고종에 대한 재조명이 갖는 의의
2. 대한제국은 근대를 지향한 절대주의 국가이다
(1) 대한국국제의 반포와 절대국가의 성립
(2) 전환기 국가로서의 대한제국
3. 민국이념의 계승․발전
4. 고종의 대외인식과 대응

Ⅲ. 내재적발전론 측면에서 대한제국 재정운영에 관한 논증

1. 대한제국의 근대적 재정 제도
2. 근대적 경제 성장 여건 충족여부
3. 근대적 경제성장의 지표
4. ‘왕정 부패’설의 진상

Ⅳ. 내재적 발전론 측면에서 대한제국의 근대화 노력

1. 근대화의 개념
2. 한국근대화의 특수성
3. 대한제국의 자주적 근대화 노력
(1) 철도개발
(2) 황성만들기-서울의 도시개조사업

Ⅴ. 마치며

參考文獻
본문내용
(2) 전환기 국가로서의 대한제국
대한제국은 이전의 조선왕조와도 달랐지만 그렇다고 근대 국민국가라고 규정하기도 어렵다. 하지만 근대 국민국가를 지향하는 단계, 전환기 국가로 판단할 수 있다. 조선왕조의 맥락으로 보면, 봉건적인 분권경험을 지닌 서양이나 일본과 달리 5백여 년 동안 전제적 중앙집권적 국왕을 중심으로 정치가 이루어졌다. 그렇기에 왕권을 폐기한 위에서 국민국가를 구성하려고 하는 시도가 불가능할 만큼 국왕 중심의 정치가 강고한 규정력을 발휘하고 있었던 점을 유념해야 한다. 주진오, 개명군주이나, 민국이념은 레토릭이다, 청문회, 130면.
그렇기에 왕권은 근대화 과정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담당해야 했고, 그 형태가 절대주의국가인 대한제국으로 나타났다. 이 시점에서 바로 근대 국민국가와 같은 민주체제가 수립되기를 바라는 것은 과욕이 아닌가.

3. 민국이념의 계승․발전
그러나 전환기 국가로서의 대한제국의 위상과 고종의 개명군주성이 증명되기 위해서는, 고종의 정치이념이 民을 단순한 지배의 대상이 아니라 나라의 주체로 君과 民의 관계를 재정립했다는 전제가 필요하다. 긍정론에서는 18세기 탕평군주의 민국이념의 계승 ․ 발전이 그 같은 역할을 했다고 본다.
부정론에서는 영조 ․ 정조의 ‘탕평군주’의 민국이념 계승은 근본주의적인 성리학의 교의체제 이영훈, 고종은 여전히 소중화적 세계관에서 헤엄친다, 청문회, 97면.
이며, 따라서 그 시대의 민중들의 평등이념을 수용할 수 있는 비전은 아니라고 말한다. 또한 이러한 이념 아래서의 사회구조는 근대적 국민국가가 기반 하는 ‘民’의 동질성은 확보될 수 없다고 한다.
‘民’의 동질성 자체를 확보해주는 이념은 아니라는 비판은 유효할지 모른다. 그러나 민국이념은 근본주의적인 성리학의 관점에서 계승된 것이 아니라, 당시의 변화하는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었다. 어느 이념도 시대와 역사의 요구를 외면하며 지속될 수는 없다. 18세기 정조는 민국이념 차원에서 공사 노비제를 전면 철폐했고, 그것은 민중들 사이에서 성장해가는 평등이념을 수용한 것이었다. 고종은 그 뜻을 계승하여 사노비 세습혁파 재천명(1886)을 하였고, 1894년 갑오개혁 신분제철폐는 이런 것들을 배경으로 가능한 것이었다. 또한 시대적인 비전이 없다는 주장의 근거로 당대의 서학 수입, 동학의 발흥을 말하는데 김재호, , 조명 너무 세다, 청문회, 21면.
, 그렇지 않다.

탕평군주들의 군민일체 사상에는 19세기 민중들이 서학을 통해 기대한 평등주의가 이미 반영되어 있다. 정조가 죽기 직전에 이의 한 실천으로 공사노비 전면 혁파 결정을 내린 것이 그 증거다. 동학도 반왕조, 반유교적이지 않았다. 동경대전 東經大全: 천도교 교조 최제우가 저술한 천도교 경전. 1864년(고종 1) 최제우가 사형당할 때 같이 불태워졌는데, 후계자 최시형이 암송한 내용 등을 모아 1880년에 간행했다.
은 유교 경전을 읽는 듯한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유교 윤리의식이 묻어있다. …일반 서민을 유교 윤리 실천의 주체로 삼는 발상은 정조의 향례합편에서 이미 제시됐던 것이다.(이태진)

이와 같이 민중들의 평등을 향한 움직임은 민국이념에도 계속 영향을 주었고, 따라서 민국이념은 군주 측만의 발상이라기보다 아래로부터의 동력을 군주 측이 수용한 이념이었다. 이것만으로는 근대국가를 지향할 수 없었을지는 모르지만, 그 전단계의 과정을 이어나가는 기초 작업을 수행하는 것이었다.

4. 고종의 대외인식과 대응
고종을 개명군주로 평가할 수 있는 가장 큰 이유는, 고종이 문호개방 이후 조선을 둘러싼 정세의 변화와 조선 내부의 문화 변혁, 경제 성장 속에서 주체성을 갖고 현실에 대응했다는 사실이다. 즉위 초기 고종은 전통적인 화이관념으로 서양을 이해하고 있었을지 모르나, 30여년의 친정(親政)의 기간 동안 많은 사상적 발전을 거쳤다. 개항을 결심하고 개화파를 정계에 데뷔시킨 장본인이었으며, 보수적인 정부 대신들이 반대했지만 서양 열강들과 잇달아 수호조약을 체결하였다. 영환지략 청나라 관리이자 지리학자인 서계여가 푸젠성 순무로 있을 때 서양인과 사귀면서 지도를 수집해 그것을 기초로 영환지략을 서술했다. 양무운동 시기의 동문관의 교과서였다.
등의 양무서(洋務書)를 읽으면서 바깥사정에 귀를 기울였고, 서양인 선교관과 고문관을 통해 서기를 수용하려고 애썼다. 이러한 나름의 문명수용의 과정을 거쳐 군주가 직접 근대화 정책들을 추진한 것이다. 또한, 여러 차례의 보고를 통
참고문헌
이태진․김재호 외 9인, 고종황제 역사청문회, 푸른역사, 2005.
이영훈, 수량경제사로 다시 본 조선후기,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4.
안병직․이영훈, 맛질의 농민들, 일조각, 2001.
김건태, 조선시대 양반가의 농업경영, 역사비평사, 2004.
이태진, 동경대생들에게 들려준 한국사, 2005.
이태진, 고종시대의 재조명, 태학사, 2000.
현광호, 대한제국의 대외정책, 신서원,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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