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경제론] BRICs(러시아와의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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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중국경제론] BRICs(러시아와의 비교)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1. 러시아에 대한 개요
2. 과거: 문화, 역사
3. 현재: 경제, 군사
4. 미래: 환경, 외교
5. 종합
본문내용
2) 역사
러시아와 중국의 역사에서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20세기 이데올로기의 시대에 공산주의를 택한 국가였다는 점이다. 비록 중소 전쟁을 계기로 중국은 러시아의 사회주의와 결별하고 독자적 사회주의로 나아가긴 했지만 비슷한 과정을 겪었다는 점에서 비교할만하다.

중-러 '新밀월시대' 개막, 한반도의 선택은?
프레시안 2007년 3월 24일

-중러 관계, 호혜와 반목의 역사

1957년 11월 16~19일 모스크바에서 열린 전 세계 64개국 공산당 및 노동당 대표 회의에서는 사회주의 수립 및 대미 관계에 있어 전향적인 내용을 담은 '평화선언'이 채택됐다. 서방과의 발전적 관계 수립을 인정하는 이 선언이 소련과 중화인민공화국이 각자의 길로 접어드는, 아니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중화인민공화국이 소련의 공산주의 종주국 지위를 부인하고 독자노선을 걷는 계기가 됐다.

수립 초기 중화인민공화국에 있어 소련은 가장 강력한 후원자이자 지지자였다. 일개 지방 군벌 세력 정도에 불과했던 마오쩌둥(모택동)의 공산당 세력이 미국 및 서방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으며 모든 면에서 압도적인 힘을 가지고 있던 장제스(장개석) 정권을 무너뜨릴 수 있었던 가장 큰 성공요인들 중 하나는 소련의 지지였다고 할 수 있다.

당시 장제스 정권의 가장 큰 상대는, 공산당이 아니라, 일본 제국주의 세력이었다. 서방 나라들과 더불어 소련 정부는 국민당 정부의 대일항쟁을 직간접적으로 지원하고 있었으며, 그러한 관계로 장제스는 소련의 입장을 무시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소련은 이러한 자신들의 지위를 이용해 마오쩌둥의 공산당 세력을 적극적으로 옹호했으며, 그럼으로써 인민군이 중국을 공산화하는 데 커다란 역할을 했다.

중국의 공산화는 국민당 정권에 의한 중국 통일을 지원하고 있던 서방에게는 커다란 충격이었다. 미국은 직접적인 군사 간섭을 시도했으며, 서방 국가들은 타이완(대만)으로 패주한 장제스 세력을 중국의 정통 권력으로 인정함으로써 중화인민공화국을 외교 및 경제적으로 고립시키고자 했다.

이러한 시기에 일련의 군사 활동을 통해 미국의 직접 개입을 견제하고, 마오쩌둥의 공산정권을 지지한 것이 소련이었던 것이다.

공산주의 종주국이라는 이념적 위치나 외교적 지지뿐 아니라, 군사-경제-교육 등 사회 전반의 (재)구성에 있어서도 소련은 중국의 선행모델이자 적극적인 지원국가였다. 중국은 소련의 기술 및 기자재 지원을 받아 사회 기반시설을 닦고, 지원 받은 소련제 무기로 무장하고, 학생을 보내 교육을 받았다. 심지어는 계획경제를 실행하면서, 필요한 소련의 물품을 소련으로부터 차관을 받아 지불하는 형식으로 대금결제를 하기도 했다.

재미있는 것은 한국전쟁이 공산당 정권 하의 중국 경제 및 군사력에 미친 영향이다. 한국전쟁에서 일본이 이승만 정권을 지지하는 미국 주도 하의 유엔군 투입으로 경제적 이득을 챙겼다면, 김일성 정권을 지지하는 소련의 (간접적인) 지원으로 군사 및 경제적 이득을 챙겼던 것이 중화인민공화국이었다. 즉, 소련이 제시한 북한 정권에 대한 직접적인 군사원조 및 한국전쟁 개입 요구에 동의하면서 공산 중국은 상당한 양의 무기를 (무상으로) 지원 받아 자국의 군비확충에 사용할 수 있었다. (미국의 경제 지원을 조건으로 베트남 전에 참전한 박정희 정권과도 비교할 수 있겠다.)

이러한 중-소의 밀월관계, 아니 보다 정확하게는 마오쩌둥 정권의 스딸린(스탈린) 통치 하의 소련 추종 관계는 중국이 점차 안정화되어 가고 경제개발에 속도를 올려가면서 점차 변화됐다. 1953년 3월 스딸린의 사망과 이에 뒤이은 흐루쇼프(흐루시쵸프)의 스딸린 비판은 이념적인 면에서도 사회주의 강화를 강력하게 추진하고 있었던 중국에게는 충격이었다. 개인적으로는, 장개석 정권과의 대립 때 지원을 요청하기 위해 모스크바를 방문한 마오쩌둥에 대한 스딸린의 박대가 일조했을지도 모른다. 정확한 내막을 알 수야 없지만, 어쨌든 중국공산당 정권은 1957년 11월의 '평화선언'을 비판하며 소련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노선을 걷게 된다.

아니러니하게도, 그 이후 소련을 중심으로 한 동구가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구와 첨예하게 대립하면서 냉전시기로 접어든 반면, 중국은 대약진 운동과 문화혁명의 실패 후, 1971년 키신저의 방중, 1973년 닉슨의 방중, 1979년 중-미 국교정상화로 이어지며 대미 외교에 있어 유화정책으로 돌아서게 된다.

이러한 일련의 변화는 미국 중심의 한 축과 소련 중심의 한 축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목소리를 내려는 중국 외교정책의 변화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흥미로운 점은 외부로부터의 문화에 개방적이었던 러시아는 공산주의 종주국이 된 이후 계속해서 자신의 공산주의를 확산시키려 했던 데에 반해 중국은 독자적인 공산주의 노선을 선택한 이후에도 자신의 공산주의를 확산시키려는 어떠한 제스쳐나 노력을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시도함으로서 이데올로기에 침잠하기 보다는 실리를 추구하려는 모습을 보였다는 점이다. 즉, 강한 자민족적 성향과 찬란한 역사를 가진 중국은 언제나 그러했듯이 자신만의 공산주의를 탄생시켰고(그것이 자의든 타의든 간에) 그러한 독자적 공산주의 사상을 전파시키기 보다는 오히려 자리를 지키며 움직이지 않았다. 이러한 점은 마치 과거 청대 이전의 여러 왕조가 그러했듯이 타국의 문화를 침해하지는 않지만 자신에게 스스로 찾아오도록 한 모습과 닮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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