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사] 당대 폐불론의 역사적 사상적 조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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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동양사] 당대 폐불론의 역사적 사상적 조명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Ⅰ. 들어가며
Ⅱ. 당 중기의 시대적 상황
1. 정치적 상황
2. 사회․경제적 상황
Ⅲ. 당시의 사상적 상황
1. 불교
2. 도교
3. 유교
Ⅳ. 폐불론
1. 한유의 폐불론
2. 이고의 폐불론
Ⅴ. 폐불론의 경과 - 송대의 주자학으로의 전개
Ⅵ. 나가면서
본문내용
Ⅰ. 들어가며

무릇 모든 사상이나 철학은 그 시대의 상황과 무관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사상이나 철학은 그 시대의 사람들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헤겔은 그의 주저서인 『역사철학』에서 “철학은 현재적인 것, 현실적인 것을 다룬다.”, “공허한 것은 아무런 이상도 아니요, 오직 현실적인 것만이 이상이라는 것을 철학은 지향하는 것이다.” 박종오, 철학개론, 서론 Ⅱ의 1. 철학과 현실, 형설출판사, 1982
라고 말한다. 그러나 실재적으로 역사와 사상은 서로 분리되어서 서로 다른 길을 걸어온 것이 사실이다. 그것은 서로의 관심 분야가 다르기 때문이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이 두 분야의 분리로 인하여 각각 서로 한계점을 갖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예를 들어서 서양사에서의 중세의 크리스트교에 대하여 한 학기 강좌를 한다고 치자. 크리스트교가 성립되기 위한 기반은 플라톤 철학이 그 토대를 제공하지 않았다면 서양에 있어서의 크리스트교는 성립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또 다른 예로 마르크스의 사회주의 이론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전 세계의 공산주의 국가가 성립되지 않았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철학이나 윤리학도 사상가들의 사상만 연구할 뿐이지 그 사상이 사회에 미친 영향이나 역사에서의 위치에 관해서는 거의 언급을 하지 않고 있다. 마찬가지로 지금 필자가 언급하고자 하는 당 대의 폐불론에 관해서도 서로의 각자의 길을 추구하고 있다. 따라서 이 글은 이러한 사상과 역사의 관계를 재조명하는 관점에서 필력하고자 한다. 미흡하나마 이러한 작은 시도만이 두 분야의 연관성과 보다 폭 넓은 역사관과 철학관을 형성하리라는 믿음에서 작은 시도를 해본다.
당 중기 이후의 폐불론은 당시 시대적 상황과 사상적인 상황에 기인한다. 당 중기 이후의 안록산의 난 이후에 당의 국제적 성격은 큰 타격을 받고 쇠퇴하였으며, 사상적인 부분에서도 불교와 도교의 성행으로 인하여 여러 가지 폐단이 속출하였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나온 것이 바로 폐불론으로 유교적인 이론뿐만 아니라 보국 안민을 위한 정치, 사회, 문화적인 모든 면에 기인하고 있다. 특히 한유를 중국 사상사에 있어서의 맹자와 버금가는 중요한 인물로 평가하고 있는데 이것을 조명하기 위해 부단하게 한유의 사상을 끌어들였으며 한유를 비롯한 폐불론 이후의 역사전개에도 관심을 기울여 봄직하다.



Ⅱ. 당 중기의 시대적 상황

1. 정치적 배경
① 안사의 난 新唐書 卷225, 열전 150

안사의 난은 현종 천보 14년(755)에서 대종 광덕 원년(763)에 걸쳐 일어난 대란으로 당대의 황소의 대란과 함께 당대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에 가장 큰 변화를 일으킨 역사적 의미를 갖는 반란이라고 할 수 있다. 안록산의 난은 平慮, 范陽, 河東 3진의 절도사를 맡고 있었던 안록산이 20만의 병력을 거느리고 반란을 일으킨 것으로 안록산 사후에도 그의 부하인 사사명이 뒤를 이어 9년간에 걸쳐 일어난 란이다. 안록산의 난은 봉기 한 달만에 낙양을 점령하고 반 년만에 장안을 점령하고 국호를 大燕, 연호를 聖武라 하면서 크게 위세를 떨쳤다. 그러나 지방차원에서의 저항, 위구르의 당군
참고문헌
․이상순, 한유 철학 사상의 역사적 성격에 관한 연구, 성균관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1994
․박종오, 철학개론, 형설출판사, 1982
․卞麟錫, 『안사의 난의 성격에 관한 새로운 관견』, 영남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 논문, 1982
․중국 북경대 철학과 연구실 유영희 역, 중국철학사 2(한, 당편), 자작아카데미, 1994
․아서라이트 양필승 역, 중국사와 불교, 신서원, 1994
․유승국, 「송대 성리학 형성의 연유적 고찰(상)」『대동문화연구』 제 1집, 대동문화연구원, 일지사, 1986
․方立天 박경환 옮김, 중국철학과 인성의 문제, 예문서원, 2000
․金谷治 외 조성을 譯, 중국 사상사, 이론과 실천, 1986
․누노메 조후 임대희 옮김, 중국의 역사 〈수당오대〉, 혜안, 2001